
추운 날씨와 더불어 이른바 계엄 정국의 여파로 사회 불안의 상황이 우리의 마음마저 힘들게 하는 겨울이다. 출근길에도, 심신을 달래주는 공원길에도, 심지어는 어린 학생들이 자주 찾는 문화시설에도 시야가 집중되는 곳에는 어김없이 정치 현수막이 요란을 떨면서 버티고 있다. 일부러 시선을 피하고 싶어도 이 정치 현수막은 도저히 피할 수 없도록 그 존재 자체로 보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 현수막들이다. 바야흐로 전국이 정치 현수막 난립 시대라 할 만하다.
2022년 옥외광고물 법이 개정되면서 정당은 현수막을 지방자치단체장의 허가나 신고 없이 자유롭게 걸 수 있게 됐다. 직접 이해당사자인 국회의원 스스로 법을 개정해 정당 활동의 자유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한다는 취지로 자신들의 사진이 담긴 현수막을 자유롭게 내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정당 현수막에 대한 국민의 빗발치는 원성으로 지난해 울산광역시의회를 비롯한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조례를 바꿔 정당 현수막을 정해진 게시대에만 걸 수 있게 하고 선정적인 문구를 쓰지 않게 하려 했지만, 대법원은 지난 7월 “상위법에 어긋난다”라며 해당 조례를 무효 판결했다.
정당 현수막은 일반 현수막보다 규제가 느슨하다. 옥외광고물 법에 따르면 현수막을 걸기 위해선 구청에 사전 신고를 하게 돼 있다. 하지만 정당의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한 현수막은 구청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고 금지·제한 규정도 적용받지 않는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나 교차로 위주로 내걸리는 것 같던 현수막이 이제는 아파트 단지 입구 바로 앞까지 침투해 버젓이 걸려 있다. 정당 현수막 난립을 막기 위하여 정당 현수막 개수를 읍·면·동별로 2개씩만 설치하는 것으로 시행 중이지만 여전히 정당 현수막이 ‘공해’ 수준으로 산재해 있다.
서로에 대한 거친 표현과 원색적 비난으로 네거티브 구호 일색이다. 특정 후보자나 정당에 대한 비방이나 공격적인 메시지가 포함된 현수막은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고, 지역 주민 간의 분열을 낳고 울산지역의 역사적 맥락이나 정체성을 무시하고, 일시적인 정치적 메시지만을 강조함으로써 도시의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한다.
환경문제 또한 만만치 않다. 현수막을 만드는 최초 원료는 석유인데, 석유는 생산부터 사용까지 전 과정에서 막대한 온실가스를 배출해 기후 위기 주범으로 불린다. 하지만, 지자체에서는 행정 인력 부족으로 현수막 설치 현황을 파악하고 대응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해마다 늘어나는 옥외광고물을 제거하기 위한 수거보상제, 정비용역, 폐기 등의 국가 지원과 지자체 소요 예산이 매년 증가하는 상황이다. 또한, 현수막 한 장을 제작하고 소각할 때마다 4㎏이 넘는 온실가스가 배출돼 심각한 환경문제를 유발하고 한 번 제작된 현수막은 재활용에도 한계가 있다.
정당은 국고보조금을 받고, 국고보조금은 곧 세금이다. 세금으로 제작된 현수막이 도시의 미관을 해치고, 길을 오가는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면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물론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를 실현하는 방식에 있어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하고 시민의 안전을 위협해 불편을 초래한다면 과감히 바꿔내야 한다.
정당이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한 견해를 표시하는 수단은 차고 넘친다. 유튜브에는 정파적 이해관계가 담긴 채널이 가득하고, TV나 신문에서도 여전히 정치 뉴스가 제일 먼저 소개된다. 굳이 여기에 현수막까지 더해야 할 현실적인 필요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래서 정당 현수막 대신 지역 사회의 의견을 반영한 공공 미술 프로젝트나 시민들이 현수막의 설치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하여, 더 긍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방법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G7에 속하는 선진국 중 현수막 정치를 하는 나라는 없다고 한다. 결국 후진적인 현수막 정치는 대한민국에서 사라져야 할 구시대적 병폐임이 틀림없다. 이미 선진국을 표방한 나라로써 국격에 걸맞은 정치문화 조성을 위해 정치권이 스스로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김동관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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