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화(太和)는 큰 평화이다. 음양 태극의 조화이고, 천인합일의 단계이다. 세상은 평화롭고, 인간은 화목하며, 인공과 자연이 조화된 상태를 말한다. 이토록 의미있는 가치가 울산의 역사와 지리 중심에 1400년 전부터 스며들어 있다는 것에 실로 큰 자부심을 느낀다. 태화강, 태화루에 반영된 태화는 태화사 또는 진덕여왕의 연호(647~650년)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연호 자체에 숨겨진 종교적, 정치적 타협이야 있었든 없었든 표면적으로는 나라의 일치단결과 태평성대를 기원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연호는 한무제, 사찰은 석가모니가 도입했으니, 태화는 그전부터 뿌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태화는 어디에서 처음 온 말일까.
태화가 처음 나타나는 고전은 ‘주역’으로 보인다. 점술에 머물던 64괘에 공자가 단사(彖辭)를 지어 철학을 담았는데, 건괘를 해석하며 대화(大和)를 도입했다. ‘건도변화(乾道變化), 각정성명(各正性命), 보합대화(保合大和), 내이정(乃利貞)’이라는 구절이다. ‘하늘의 뜻과 변화에 맞춰 각자 역할에 충실하며 화합하면 세상이 풍요롭고 바로 선다’는 뜻이다. 대화는 곧 태화(太和 또는 泰和)와 같다. 워낙 좋은 뜻을 담다보니 중국의 여러 황제들이 반복해 연호로 삼았다.
주희를 비롯해 유학자들은 음양과 태극, 충화(沖和)에 대해 더 깊이 연구했다.
태화와 비슷한 불교 개념은 화엄사상 원융(圓融)이 아닐까?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로 요약된다. 선덕과 진덕의 신라는 이 사상을 신봉했으며 자장, 원효, 의상 모두 화쟁과 원융을 연구하고 설법했다. 불교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종교들은 태화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중국 유교통치의 중심 자금성에는 공자의 주역 해석을 따라 조성한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이 있다. 도교는 후한 말기 태평도(太平道)가 기원이 되어 조직을 갖추었고, 명나라 때는 무당산에 태화궁을 조성했다. 이렇게 보면 태화는 유불도가 공유하는 핵심가치다. 한편 소설 ‘삼총사’에는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One For All and All For One)’라는 구호가 나온다. 단합을 강조한 말인데,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기라는 의미와 상통한다.
태화를 담은 지명을 보자. 태화산과 태화사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 여럿 있다. 하지만 태화강과 태화루는 거의 유일하게 울산에 있다. 이 두 곳은 대동강, 경회루보다 규모는 작지만 그 뜻은 훨씬 넓고 깊다. 그리고 백성을 생각한다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대동(大同), 백성들의 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경회(慶會)보다 공감을 얻기에 유리한 말이다.
국내외 현대 기업들이 경영기조로 내세우는 다양성(Diversity), 형평성(Equity), 포용성(Inclusion)이라는 DEI 정책도 태화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태화의 고장, 울산에서 종교지도자가 많이 나고 팔도민이 일치단결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것이 우연이 아닌 셈이다.
울산 선조들은 태화의 의미에 자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심원권일기’를 보면 백일장 시제로 종종 등장했다. ‘태화루에 올라 국가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네(登太和樓願國泰民安, 1876)’라거나, ‘다행히 승평 시대를 만나 태화강에서 즐겁게 노니네(幸逢昇平世 盤遊太和江, 1890)’라는 사례가 있다. 녹록지 않은 시대였으니 태화를 이용해 태평을 기원하며 방법을 모색해 보고자 한 것은 아닐까? 여전히 화해와 화합이 절실한 시대다. 태화와 원융, 태평과 평화가 조금씩 다르지만 다름을 인정하며 보이지 않는 하나의 큰 뜻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자장율사와 진덕여왕이 김춘추, 김유신과 함께 원융사가 아닌 태화사를 세우고 태평이 아닌 태화를 연호로 채택한 것처럼. 태화로운 세상을 위해.
김상육 울산 중구 부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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