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녹음이 질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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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녹음이 질 무렵
  • 경상일보
  • 승인 2025.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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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상아 복산초등학교 교사

바쁜 점심시간, 배는 고파 오고 북적이는 가게에서 주문 번호가 뜨기만을 간절히 기다린 적이 있다. 주문이 밀려 슬슬 카운터와 시계를 번갈아 볼 즈음, 진땀을 빼고 있는 알바생이 보였다. 급하지만 느린 손놀림과 옆에 선 직원의 일대일 코칭으로 봐선 수습 중인 듯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조급함은 옅어지고 알바생이 혼나면 어쩌나 되레 걱정이 됐다. 멀찍이 응원하며 받아 든 봉투에는 야무지게 포장된 햄버거가 담겨있었다. ‘누구나 처음은 있다’의 ‘누구’를 마주한 순간 나의 처음이 겹쳐졌다. 당연할 수밖에 없는 엉성함과 서투름, 그리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실수에 민감한 시대에 살고 있다. 한마디 말에 가치관을 평가받기도 한다. 작은 오점에도 다양한 혐오 표현이 따라붙고, 당사자를 소위 말해 ‘나락’으로 보낸다. 이를 풍자한 영상 ‘나락 퀴즈쇼’에서는 논쟁거리가 될 답안으로 출연자를 밀어 넣는다. 적신호를 예감한 출연자가 당황할수록 조회 수는 올라간다. 서로 단속하는 모양새는 중앙에 감시탑이 있고 사방으로 수용자들의 방이 늘어선 감옥인 파놉티콘을 연상시킨다. 사람이 아닌 환경의 감시를 받는 것이다. 통과하려면 올곧은 윤리 의식의 장착이 기본이며, 여론에 따라 누군가는 너른 특혜를 받는다.

눈이 많은 학교에서 3월은 따지자면 수습 기간이다. 학생, 교사, 보호자 모두가 새 학기를 맞이한 수습생이다. 다만 학생이 수우미양가로 평가받던 시절을 지나 교육 활동이 학생과 보호자에게 평가받는 시기가 왔다. 항상 민원에 대비하고 올바른 교육 과정을 위해 외부의 시선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에둘러 쓴 생활기록부부터 조화로운 자리 배치, 더운 여름 사준 아이스크림의 배탈 가능성까지 한 번 더 점검해야 한다. 안전하고 표준화된 교육 활동과 함께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교육 환경이 조성되었다.

최근 읽은 소설 <새의 선물>은 열두 살 아이가 알아챈 어른들의 비밀 모음집이다. 주인공 진희의 시점에서 쓰였으나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 할 정도로 심리 묘사가 예리하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아이들 눈은 속이기 힘들다. 교실에서 만우절마다 기획한 장난이 초장에 걸리고야 마는 이유가 있는 법.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삶이 이어진다’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에필로그는 어른들의 석연치 않은 틈을 목격한 아이가 이 모든 것을 통해 성장한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내일이면 열두 살 진희들과의 한 해가 시작된다. 새로운 환경을 만나 낯설어할 진희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다. “그럴 수도 있지, 다시 해보자”. 아이들의 시선이 향한 곳곳에 너그러운 관용이 스미기를. 실례 한 번에 무너지는 신뢰보다는, 실례를 무릅쓰고 기다려주는 장기적인 신뢰가 필요한 시점이다. 혐오와 닮은 어두운 감정 속에서 결국엔 사랑이 이긴다는 노래 가사처럼, 녹음이 질 무렵엔 앳된 과실이 마침내 결실을 맺기 바란다.

배상아 복산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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