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의 종류는 다양하다. 매일 경험하는 일상에서 감정적 반응을 동반하지 않는 일은 하나도 없다. 너무 자주 변화하는 감정의 모습에 스스로 당황하면서 살아간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래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평생을 두고 노력한다. 명상이나 기도와 같은 종교적 의례도 감정의 파고를 줄이고 정신적 안정을 찾아가는 노력의 일환이다. 추운 겨울에도 바람 부는 강변이나 산길을 걷는 이유는 건강을 유지하고 마음의 평정을 찾아가는 데 있다. 나이 들수록 후자의 비중이 늘어난다.
우리는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삶에서 한시도 도망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자신의 감정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라고 가르친다. 감정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는 있다는 말이다. 그 의미를 알 듯은 하지만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는 힘들다. 그래도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헐렁한 고삐를 하나씩은 가지고 살아간다.
인간의 다양한 감정 중에서도 유달리 자주 경험하는 정서가 있다. 우울한 기분이다. 우울하다는 감정은 별다른 이유나 계기가 없이도 언제 어디서나 마주하는 가벼운 정서다. 그래서 사람들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그림자같은 것이라 여기며 지낸다. 슬픔이나 기쁨같은 강렬한 감정은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지만 우울하다는 느낌은 좀처럼 표현하지 않는다. 감정이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어렵거니와 타인의 공감을 얻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림자와 같이 희미한 정서가 삶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병균이 되기도 한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우울이라는 감정도 평소에는 희미한 모습으로 숨어있다가 어느 순간 한 사람의 정신을 사로잡아 버리는 것 같다. 때로는 자신의 생명을 앗아가는 무기로 변한다.
얼마 전에는 온 국민이 알고 있는 아역 배우 출신 여배우가 스스로 생명을 끊어 버렸다. 그의 어린 시절 연기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고 하지만 앞날이 창창한 20대 초반의 여배우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유라고 수긍하기는 쉽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 하루 걸러 일어나는 세상이지만 청년들의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합당한 언어를 찾기는 어렵다. 흔히 사용되는 극심한 우울증이라는 편리한 언어로 젊은 죽음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영혼을 병들게 한 원인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우울한 감정이 타인을 해하는 흉기가 되기도 한다. 초등학교 교사가 8살 난 어린 학생을 난자한 일이 발생했다.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극악무도한 행동을 우울이라는 감정 상태를 견디지 못해 저질렀다고 한다. 우울이라는 정서의 실체를 어떤 말로 정의하고 대처할 것인지 암울하기만 하다.
우울이라는 정신 상태는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다. 우울한 기분으로 고통받아본 경험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래도 저마다의 방법으로 그 감정 상태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하는 생존 기술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우울한 사람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 청년도 우울하고 노인도 우울하다. 자신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는 친구가 필요하고 진심 어린 대화 상대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에 부응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우울증에 필요한 약품은 늘어나고 있지만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 것이 현실이다.
노인의 우울증이야 생리적 현상이라지만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 우울해지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우리 사회의 냉혹함이 젊은이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들이 세상에 대한 면역력을 얻기도 전에 시들어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알약보다 따뜻한 우울증 치료제를 인간이나 자연 속에서 찾아내기를 바라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삶을 먼저 살아낸 사람의 노파심이다.
김상곤 칼럼니스트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