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2월24일 러시아의 전면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벌써 3년이 지난 까마득한 예전 일이다. 당시에는 전쟁이 발발하면 러시아의 승리로 곧 종결될 것이고, 더욱 대담해진 러시아는 발틱 3개국을 다음번 사냥감으로 삼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이와 같은 관측은 산불처럼 번져갔고 주헝가리 대사로 재임 중이었던 필자도 헝가리를 비롯한 비셰그라드 4개국(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포함)과 전체 EU 국가들의 관련 동향을 파악하고자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우크라이나 대사는 호방하고 솔직한 편이었는데 개전 직후에 가진 면담에서 긴박했던 전황을 설명하던 중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면서 침략자를 반드시 응징하겠다며 비장함을 보여줬다. 그녀는 헝가리 오르반 총리의 친러 성향을 공개적으로도 맹비난했기에 헝가리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경고를 받았다. 그래서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본국으로 소환됐다.
러시아 대사와는 개인적으로 친분관계가 깊었는데 전쟁 이후에는 공개적으로 만나기가 여의치 않았다. 선뜻 나서서 전화하기도 어려웠는데, 필자의 서울 복귀 소식을 어디선가 전해 듣고는 두 사람만의 송별연을 베풀어 줬다. 전쟁 명분도 약했고 강대국의 침략전쟁이라는 국가적 오명을 벗어날 수 없었기에, 외교가 내의 왕따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늘 풀이 죽어 있었다.
푸틴 대통령과의 막역한 관계를 과시하던 오르반 총리는 전쟁 직전에 모스크바를 방문해 푸틴을 끝까지 설득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양자 회담결과도 소개하며 ‘평화를 애호하는 푸틴’ 찬가를 부르면서 개전 가능성을 일축했다. 웬걸! 얼마 지나지 않아 전면전이 벌어졌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젊은 병사들이 전쟁터 곳곳에서 생명을 잃은 채 쓰러져 갔다. 기본 인프라와 삶의 기반도 철저하게 파괴돼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전쟁은 왜 시작됐고 정녕 피할 수는 없었던가? 2019년 취임 이래 젤렌스키 대통령은 줄곧 반러시아 행보를 취했고 EU와 NATO의 가입마저 시도하면서 러시아의 불편한 심기를 자극했다. 국경선 너머로 러시아 군대가 대규모로 집결하면서 전쟁의 예후는 짙게 드리웠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을 수복하고자 하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예봉과 의지를 꺾어버리겠다는 푸틴 방식의 ‘겁주기 전술’로 치부됐다.

전쟁으로 얻을 이익보다 손해가 클 것임이 자명한 데다, 푸틴 대통령을 합리적인 지도자로 전제한 전망이었다. 러시아로서는 짧은 기간 내 승리를 거둬 친러시아 성향의 지도자를 꼭두각시로 앉힐 계산이었겠지만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을 ‘침략자’라는 주홍 글씨와 다양한 국제 제재를 또 어찌 감당할 것인가? 러시아의 후환이 두려워 그간 중립을 표방해 온 스웨덴과 핀란드에 NATO 가입 명분이라는 큰 선물을 주게 될 것임도 불 보듯 뻔한 일 아니었는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푸틴만의 셈법과 복안이 있었던 건가?
세계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조지 패튼 장군의 명언이 떠오른다. 그는 “바보들이 조국을 위해 죽는다고 전쟁에 이길 수는 없다. 더 가엽고 불쌍하며 바보 같은 적들이 그들의 조국을 위해 더 많이 죽도록 만들면 이긴다(No bastard ever won a war by dying for his country. He won it by making the other poor dumb bastard die more for their country)”고 말했다.
무고한 이들이 쓸데없이 왜 죽어야 하는가? 푸틴과 젤렌스키는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지혜’를 가르친 손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어야만 했다. 한번 시작된 전쟁은 돌이키기 어렵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우크라이나도, 러시아도 상상하지 못할 막대한 피해를 입고있다. 미국도, 유럽도, 아프리카도, 그리고 유라시아 대륙의 먼 끝 쪽에 위치한 우리의 희생도 적지 않다.
미국인들은 하마스 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적 실패를 맹렬하게 비난한 트럼프 후보의 손을 들어 줬다. 바이든 정부의 국제주의적 세계질서는 미국 국익만을 최우선시하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손을 떼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위협에 유럽의 위기감이 가중되고 있다. 이미 엄청난 전비를 지출했고 대러 경제제재 가세로 값싼 러시아산 화석연료의 도입이 막혀 전기료는 살인적으로 인상됐고 제조업은 위축되고 한겨울 내내 시민들은 벌벌 떨었다. 이제는 파병이라는 외통수를 맞이할 수도 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오데사 등 주요 항구 봉쇄로 양질의 값싼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공급이 제때 이루어지지 못해 고통을 겪어야 했고 EU의 대아프리카 국제개발협력지원(ODA) 여력 부족은 또 다른 어려움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전쟁 이전 러시아 시장을 석권했던 현대차와 기아차는 생산공장을 버려둔 채 떠나야만 했다. 6자회담 당사국으로서 북핵문제에 있어 공조해 왔던 러시아는 지난해 6월 북한과 ‘포괄적전략동반자관계조약’을 체결했고, 이어 북한군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다. 러북간 군사협력은 더욱 노골화 양상을 보일 것이고 향후 북한이 7차 핵실험 등 전략적 도발을 일으킨다고 해도 러시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러측 비토권한 행사로 안보리 대북 제재 레짐이 제 기능을 발휘할지 못할 것이다.
전쟁은 하루빨리 끝나야 한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도, 우리 기업들의 전쟁 재건 참여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북러 관계를 단절시키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북러가 군사동맹의 관계를 유지하는 와중에 트럼프의 러브콜을 푸틴과 김정은이 받게 된다면 정녕 낭패다.
박철민 울산대 교수 전 울산시 국제관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