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주경야독: 논밭을 가는 춘분, 마음 밭을 가는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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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주경야독: 논밭을 가는 춘분, 마음 밭을 가는 독서
  • 경상일보
  • 승인 2025.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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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해 시인·전 울산문인협회장

지난 1월, 잘 아는 J시인이 스마트폰에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울산도서관 종합 장서실 입구에 필자의 시집이 전시된 사진이었다.

기분이 꽤 고무된 나머지 그 광경을 친견하기 위해 도서관을 방문했더니, 5년 전 발간한 세 번째 시집이 다른 서적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서가 속 잠자는 도서 플러스 대출’이라는 배너가 설치되어 있었다.

담당자에게 사연을 물은즉, 올해 특별기획으로 2020년~2022년에 입고된 도서 중에서 대출이 되지 않았지만, 읽을 만한 책을 골라 두 달마다 100권씩 연중 600권을 전시한다고 했다.

기존의 다섯 권에 ‘잠자는 도서’ 3권 포함 8권까지 대출 가능하다고 하니 내 책이 서가 깊은 곳에서 잠을 과하게 자고 있었다는 생각에 금방 씁쓸한 기분이 되었지만, 독서를 장려한다는 측면에서 좋은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나 책이나 높은 데 있으면 쓸모가 없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울산도서관만 해도 장서 28만7000여 권 가운데 한 번도 읽지 않은 책이 얼마나 많겠는가? 전국적으로 보면 엄청난 종이책이 사람들의 손길은커녕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채 높고 깊은 서가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작년 어느 기관에서 조사한 국민 독서실태를 보면 세대를 막론하고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 50%나 된다고 한다.

그나마 시를 낭송하고 동화를 구연함으로써 문학의 이해를 용이하게 하는 낭송가 단체들도 있고, SNS상에 왕성한 독서량으로 읽은 책을 소개하는 사람들이 많은 게 다행이다. 이분들은 독자들을 책과 친밀하게 함으로써 독서인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春分)이 지났다.

이날을 전후하여 농경(農耕)민족인 우리는 농사 준비에 바빴다. 농사의 시작인 논밭 갈기를 차질 없이 행해야만 한 해 동안 걱정 없이 풍족하게 지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주경야독(晝耕夜讀)이란 말은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는다’는 뜻이다. 이를 몸소 실천한 다산 정약용은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중에도 낮에는 적소(謫所)에서 농사를 짓고 밤에는 책을 읽으면서 자신을 절차탁마하는 한편 유배지 주민들을 가르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에 실을 만큼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나 ‘많은 책을 수레에 실어 나르느라 소가 땀을 흘리고, 집안 들보에 책으로 가득 차 있다’는 ‘한우충동(汗牛充棟)’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생은 끝없는 공부의 연속이다.

책의 탄생은 인류문명에 대단히 중요한 기능을 했다. 종이의 발명과 인쇄술의 발달로 책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독서를 통해 인간의 지식이 광범위하게 축적되었다. 선지자들의 경험과 지혜가 차곡차곡 집대성된 책을 바탕으로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함으로써 책의 한살이도 전자책, e-BOOK, 웹툰, 오디오북 등 생성형 인공지능 시대로 진입하고 있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개권유익(開卷有益)’이란 말은 ‘책은 열기만 해도 이익이 있다.’는 의미이다. 햇볕 드는 창가에서 차를 마시며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낭만적 삶은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책은 시간 날 때 읽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읽는 것이 옳다.

농부는 풍요한 가을을 기약하며 밭을 갈고 어치는 겨울을 나기 위해 도토리를 갈무리한다. 벌이 1kg의 꿀을 만들기 위해 560만 송이의 꽃을 찾아다니듯, 바쁘고 고단한 삶일지라도 우리는 마음의 밭을 갈기 위해 탁자 위에 한 권의 책이라도 준비해 두면 좋으리라.

권영해 시인·전 울산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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