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깍발이>의 저자 이희승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주로 중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수필 ‘청추수제(淸秋數題)’에서 ‘이슬’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슬은 예술의 주옥편(珠玉篇)이다. 하기야 여름엔들 이슬이 없으랴? 그러나, 청랑(淸朗) 그대로의 이슬은, 청랑 그대로의 가을이라야 더욱 청랑하다. 삽상(颯爽)한 가을 아침에 풀잎마다 꿰어진 이슬방울들의 영롱도 표현할 말이 막히거니와, 달빛에 젖고 벌레 노래에 엮어진, 그 청신(淸新)한 진주 떨기야말로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할 뿐이다.’
돌아오는 일요일은 24절기로 보면 ‘백로(白露)’이다. 처서 지난 지 보름이 되는 이즈음의 밤에는 기온이 내려가고, 대기 중의 수증기가 엉켜서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히 나타난다.
가을이 다가오면 투명하고 맑았던 이슬이 점차 차갑고 묵직하게 변하듯, 우리네 마음도 더욱 단단해진다.
기러기 날아오고 제비는 강남으로 돌아가며, 뭇 새들이 겨울을 위해 먹이를 갈무리하면서 곧 낮과 밤의 길이가 균형을 맞추는 ‘추분’이 된다.
이슬은 점점 굵게 응결하고 풀잎은 서늘한 기운을 머금는다. 한여름의 격정은 식고 마음은 점차 내면으로 향하는 때, 침잠(沈潛)을 배우고 깊은 사색을 허락받는다.
밤이 꽤나 길어지고 기온이 뚝 떨어질 때 반짝이던 이슬은 냉기로 바뀌고 비로소 찬 이슬, ‘한로(寒露)’가 찾아온다.
추분과 한로는 가을이 깊어가는 시간.
이슬은 계절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부드러운 언어다.
소리 없이 내려앉아 루비처럼 반짝이는 순간을 선물하고는 햇볕 속으로 반짝 사라진다. 무심히 지나치기엔 너무 투명하고, 오래 붙잡기엔 너무 덧없는 그것.
그 사라짐이야말로 이슬의 본질이다. 그 순간이 전부이고, 그 찰나가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초로(草露) 같은 인생’이란 말도 있듯이, 어쩌면 인생은 옛사람들 말씀처럼 하루하루가 이슬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짧고 투명하며 덧없지만 빛나는 흔적을 남기는 존재.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김민기가 작사·작곡하고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은 부드러우면서 힘찬 멜로디로 자연 속에서의 순수한 감정을 담고,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느꺼이 하루를 출발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더위는 처서에 죽고, 이슬은 백로에 내린다’라는 말처럼, 백로를 기점으로 기온은 뚜렷하게 내려간다. 과학적으로 이슬은 기온 차가 만들어낸 자연 현상이지만 이 시기에는 가을이 본격적으로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다.
찬 기온이 땅을 식히고 공기 중의 수증기를 끌어내리는 것은 건조하게 표현하면‘응결’이지만, 우리 마음에는 ‘이슬이 내리는 감촉’으로 다가온다.
하루의 끝인 밤과 새벽의 경계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그것은 마치 우리 내면의 감정과도 닮아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밤이 깊어갈수록 응어리져 맺히는 어떤 마음.
백로는 쉽게 사라지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지녔으나, 김춘수의 ‘꽃’에서처럼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로 남게 된다. 하여, 이슬은 ‘잠깐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음’을 알려주는 조용한 선언이다.
풀잎 하나에도 계절이 스미고, 그 계절 속에 우리의 시간이 머문다. 그러므로 ‘이슬’은 덧없으나 쉬이 사라지지 않는 언어, 인생과 문학의 좋은 소재가 된다.
권영해 시인·울산예총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