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백로였다.
오늘은 날이 흐리고
어린 것의 손목을 잡고
셔터가 내려진 상가들 차양 밑에서
남자가 무화과를 팔고 있었다.
기단이 짧은,
허리가 가는,
잇바디가 고르지 않아도 환한 무화과,
사연이 많은 단물이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마천루(摩天樓), 마천루.
야경(夜景)이 아름다운 나라의 여름에 너무 익어 열매가 까만,
쥐똥나무 휘어진 허리는 더 휘어지고
어금니를 발치한 구멍처럼 꺼멓게,
남자의 눈언저리를 닮아
깊어가는 저녁
어제는 백로였고
오늘은 날이 흐렸다.
늦더위 끝자락을 부여잡은 ‘절기’

흰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 처서와 추분 사이에 있는 백로는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가시고 가을의 서늘하고 청명한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가을의 문턱에 자리 잡은 절기이다. 요즘은 온난화로 인해 가을의 시작보다는 늦더위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어정쩡한 깍두기 같은 절기라고나 할까.
시에서도 백로는 어정쩡하게 표현되어 있다. 어제는 백로였고 오늘은 날이 흐리다니, 보통 백로 이후는 청명한 가을로 접어드는 편인데 여전히 날이 흐리다는 것은 어린 것을 데리고 무화과 파는 남자의 삶이 신산하고 고달프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나마 팔고 있는 무화과도 ‘사연이 많은’ 남자의 삶처럼 못생긴 하품이다. 하지만 무화과 속은 환하다. 단물이 떨어질 것 같다. 남자는 고단함 속에서도 삶의 희망이나 가치를 품고 있다. 이 환함은 야경과는 다른 환함이다. 겉으로 빛나는 마천루의 야경과 달리 속에 품고 있는 깊은 빛이다.
어금니를 발치한 꺼먼 구멍이 마음에 걸린다. 이건 남자가 마주한 여전히 고단한 현실일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도 날이 흐렸다는 표현이 반복되는 걸 보니 남자의 삶이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파는 무화과의 속은 환하고 단물이 가득하다. 기꺼이 무화과를 사며 그 많은 사연에 귀 기울이고 싶은, 어린 것의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은.
‘백로에 비가 오면 십 리 천석(千石)을 늘인다.’라는 속담이 있다. 백로에 오는 비가 풍년의 조짐이라는데, 시에서는 비 대신 날이 흐리다.
송은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