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무들은 그의 믿음대로 종자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마을 이곳저곳에 농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천동과 동무들은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인사를 하고 자신들도 올해는 논농사를 지을 것이라고 하였다. 모내기는 품앗이가 필요한 농사라서 미리 얼굴을 알리면서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할 요량인 것이다. 사실 열 두락 정도면 세 명이서 모내기를 해도 되기는 하지만, 서로 협력해야 물대기 할 때 다툼이 일어나지 않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천동이 산 논은 저수지 밑에 위치한 수리안전답이어서 이앙법으로 벼농사를 할 수 있는 일등급의 귀한 땅이다. 그래서 모판도 열심히 만들고 세 명이서 번을 서면서 물대기도 하여 잘 키운 모를 옮겨 심었다. 천동과 친구들은 모내기를 한 후에 열흘 동안 벼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이대로만 잘 자라준다면 가을에는 풍년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국화는 동굴집에 남아서 혼자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이 두려웠지만 차츰 동굴집에서 혼자 있는 것이 두렵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천동이 없는 하루하루가 두렵고 무서웠다. 그래서 두 달 만에 마침내 국화는 고집을 꺾고 천동이 거주하는 초가의 사랑채에 살게 되었다. 사랑채라고는 하지만 바로 옆에 덧대어 지은 집이고, 문을 열면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건넌방이었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한 천동은 새끼줄을 잡아당겨서 위험을 알릴 수 있는 장치까지 마련했다.
천동은 부족한 식량을 대신해 줄 물고기를 잡기 위해 지난 3월부터 저녁 무렵이면 먹쇠와 부지깽이를 대동하고 쇠내로 갔다. 쇠내는 경주에서 태화강 쪽으로 흐르는 개울로, 천오백 년 전에는 서나벌국이나 왜국, 한나라의 낙랑과 대방으로 가는 달천철장의 철을 실어 나르던 곳으로 유명했다. 쇠내라는 이름도 철을 나르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천동은 모화 근처의 중산 속심이 마을에서부터 삼십 리 물길을 따라가며 시간이 허락하는 한 쇠내에서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았다. 거의 매번 대나무로 만든 구덕 가득히 고기를 잡곤 하였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물속에서 고기를 잡아내는 모습은 신기 그 자체였다. 바다와 연하여 있는 쇠내는 장어가 많았다. 그런데 장어만큼은 아무리 노력해도 맨손으로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천동은 손바닥을 다쳤을 때처럼 천으로 싸맨 후에 장어잡기에 다시 도전했다. 그렇게 해서 천동은 마침내 맨손으로 장어도 잡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힘이 좋은 장어 한 마리면 하루를 굶어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장어는 몸의 기력을 회복하는 데는 더없이 좋은 음식이다. 천동의 맨손 고기잡이는 수년간 검술을 수련한 덕도 많이 본 거 같았다. 동네 사람들치고 천동이 준 물고기를 안 먹어본 사람이 없었다. 그 덕에 천동은 마을 사람들의 인심을 많이 얻었다. 천동은 동리의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돌쇠 어멈이 영양실조로 쓰러졌을 때는 근 사십 리나 떨어져 있는, 송현마을의 태화강 상류까지 원정 가서 어른 팔뚝만한 잉어를 잡아다가 고아드려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했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