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망(因陀羅網, indrajala)이라는 용어가 있다. 불교의 수호신이라는 제석천(帝釋天)의 궁전 위에 끝없이 펼쳐진 그물을 말하는데, 촘촘히 연결된 관계의 망(網)을 비유할 때 사용한다. 끝없이 펼쳐진 그물의 무수한 그물코마다 모든 모습을 담아내는 영롱한 보배 구슬이 매달려 있다. 하나의 구슬에는 다른 모든 구슬의 모습이 담기고, 아울러 그 구슬의 모습은 다른 모든 구슬에 담긴다. 또 한 구슬에 담긴 다른 모든 구슬의 모습이, 다시 다른 모든 구슬 안에 낱낱이 박힌다. 이렇게 모두의 모습이 거듭거듭 모두에게 담기는 관계가 끝없이 펼쳐진다. 모든 현상의 관계도 이와 같다. 서로에게 담기고, 서로를 담아내는, 중층의 역동적 상호 관계가 끝없이 전개된다. 모든 현상은 ‘끝없이 서로를 품고 서로에게 안기는 역동적 관계’(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에 놓여있음을 알려 주려는 비유이다. 화엄 교학에서는, <화엄경(華嚴經)>에 자주 등장하는 이 인드라망의 비유로써 세상을 ‘모든 현상이 틈 없이 서로 품고 서로 안기는 역동적 관계 세계’(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라고 설명한다.
인드라망의 비유를 통해 세계 전체가 ‘장엄한 역동적 상호 관계의 그물망’이라는 점을 역설하는 화엄 연기 사상의 핵심 취지는, ‘관계의 형식적 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은덕의 현실화 노력’에 있다. 밥 한 숟가락이 내 입에 들어오는 데는, 세계의 모든 것이 직·간접으로 참여한다. 그러니 ‘내가 잘나서, 내 능력 때문에, 내가 내 밥 먹는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 입에 밥 한 숟가락 들어오게 해 준 세상의 모든 관계에 감사드린다’라면서 수저를 들라는 것이다. ‘관계의 구조’에 대한 개안을 통해 ‘관계의 은덕’을 알고, 그 은덕에 응하는 생각과 행위로 삶을 일구어 가라는 것이다.
정보기술 문명이 터준 ‘말의 길’(語路)은 전형적인 인드라의 그물망이다. 페이스북이나 X(트위터) 같은 SNS(Social Networking Service), 텔레그램 등의 모바일 메신저는, 가히 지구를 뒤덮은 그물망의 그물코마다 매달린 영롱한 구슬들이다. 한 구슬에 담아낸 말의 모습은 다른 모든 구슬에 즉각 담긴다. 그 말 모습에 반응하는 다른 구슬들의 말 모습들은, 또다시 다른 모든 구슬 안에 곧바로 담긴다. 그리고 그에 반응하는 또 다른 말 모습들이 생성되고 다시 전파된다. 반응과 재반응의 말 모습들이 모든 구슬의 참여 속에 총체적으로 어울리면서 말 세상을 역동적으로 창출해 간다. ‘끝없이 서로 품고 서로에게 안기는 말의 어울림’(중중무진언어연기重重無盡言語緣起)이 펼치는 언어 춤사위다.
문제는 ‘관계의 구조’가 아니라 ‘관계의 내용’이다. 관계의 구조는 ‘차이 포섭과 의존의 은덕 구조’이지만, 관계의 내용은 ‘차이 왜곡과 기만 및 차별의 폭력’일 수 있다. 만약 인드라망에 담겨 중층적으로 변이하면서 영향력을 펼쳐내는 말이 차이 왜곡과 기만, 차별의 얼굴이라면, 이 인드라망은 차이 혐오와 배제의 아수라장이 된다. 한 구슬에서 발산되는 이런 모습의 말은 무한한 역동적 관계 그물망을 통해 거듭 증폭되어 삶과 세상을 아비규환으로 채운다. 만약 한 구슬에서 발산되는 말 모습과 그에 화답하는 인드라망의 말 연쇄가 숙고와 성찰, 관용과 자애의 모습이라면, 이 말 길 인드라망은 서로를 이롭게 하는 화장세계(華藏世界)가 된다. 인드라망의 관계 구조는 이처럼 양면적 내용을 그 잠재적 가능성으로 품고 있다. 화엄 연기 사상의 취지는 ‘관계 구조’의 양면적 현실화 가능성을 일깨워주면서 ‘화장세계를 구성하는 관계 내용’으로 이끌어 주는 데 있다.
원효는 경주 분황사(芬皇寺)에 살면서 <화엄소(華嚴疏)>를 짓다가 <제4 십회향품(第四十廻向品)>에 이르자 마침내 붓을 놓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현재는 <화엄경소>의 서문과 <여래광명각품(如來光明覺品)>에 대한 주석만 전해지고 있어 화엄 사상에 대한 원효의 식견을 온전하게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존하는 <화엄경소> 서문만 보아도 원효의 화엄 이해가 얼마나 탁월한 수준인지 알 수 있다. 그가 <화엄경>의 ‘모든 것을 중생 세계의 이익을 위해 되돌리는 가르침’(十廻向品)을 해설하는 부분에서 절필(絶筆)하였다는 점은 주목된다. 이 ‘절필’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원효가 이후 모든 집필을 중단하고 세간의 중생과 어울리는 무애의 삶을 펼쳤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근거가 있는 관점은 아니다. 원효는 출가 후 혈사(穴寺)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수행과 집필 및 ‘뭇 차이들과 현장에서 어울림’을 함께 아우르는 행보를 지속했다고 보는 것이 실제에 가까울 것이다.
<화엄경> <십회향품>에 이르러 붓을 놓았다는 기록은, 원효가 <화엄경>의 주석을 포기하거나 중단했다는 것이 아니라, <십회향품>이 그가 추구하고 실천해 온 사상을 장엄하게 펼치고 있다는 점에 크게 감복했음을 극적으로 묘사한 기록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확인되는 원효의 저술 목록에는 <화엄경소(華嚴經疏)(10권)> <화엄경종요(華嚴經宗要)> <화엄강목(華嚴綱目)> <화엄관맥의(華嚴關脈義)>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효는 <화엄경> 전체에 관한 주석뿐 아니라 다양한 화엄 사상 연구서를 저술하고 있다. 원효가 <화엄경> 관련 연구와 집필을 중단한 적이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원효 사상은 두 가지 특징이 서로 얽혀 있다. 마치 두 가닥 끈이 서로 꼬여 하나의 줄을 이루는 것처럼. 한 끈은, ‘중생 세계와 진리 세계는 같지도 않고 별개의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접속한 채 진리를 구현하는 것이 깨달음의 길’이다(진속眞俗의 불일부이不一不二)’라고 하는 진리관이다. 다른 한 끈은, ‘세상은 온통 ‘차이(相)들의 관계’이고, 깨달음은 ‘차이(相)에 대한 시선과 관계 방식’에서 성취된다’라는 진리관이다. 이 두 진리관을 하나로 엮은 것이 원효 사상의 특징이기 때문에, <화엄경> <십회향품>이 펼치는 ‘중생 세계로 되돌리는 가르침’은 원효에게 깊은 감흥과 공감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 장면이 회자하면서 전래한 것을,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십회향품에 이르러 절필하였다’라고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정보기술 문명이 직조(織造)해 낸 ‘말 길 인드라망’에서는 ‘야만의 쟁론들’이 거듭거듭 재생산되면서 손쉽게 그 위세를 확장해 갈 수 있다. 스마트폰 화면을 몇 차례 누르기만 하면 ‘자기’를 온 세상에 드러내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강렬한 매력이다. ‘정보통신 말 길 인드라망’이 제공하는 손쉬운 자기 현시와 강한 파급력의 마력에 취하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숙고와 성찰, 배려와 존중의 말이 설 자리를 잃는다. 멈춤과 살핌의 시간이 불필요하면서 그 파급 효과는 강력한 ‘야만의 말들’이 준동한다. 영리한 야만이 뿜어내는 말 공해가 인드라망을 뒤덮는다. 차이 혐오와 적개심을 증폭시켜 가는 ‘쟁론의 인드라망’이다. 야만의 말이 지배하는 쟁론 인드라망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회의의 온상이다. 원효는, ‘절망을 키우는 쟁론 인드라망’을 ‘희망을 파종하고 가꾸어가는 화쟁 인드라망’으로 바꿀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SNS를 ‘화쟁 인드라망’으로 가꾸어가려는 집단 지성의 협업은 다양하게 싹을 틔우고 있다. 원효의 화쟁 사상은 그 싹을 키우는 고단위 비료다.
글=박태원 인제대 석좌교수(화쟁인문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