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생각]소실점 밖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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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생각]소실점 밖의 세계
  • 경상일보
  • 승인 2025.10.3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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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훈화 서양화가

추석 전 어느 오후, 음악 방송을 들으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음악이 끝나고 신청인의 사연이 흘러나왔다. “할아버지, 저희 할아버지를 위해 이 곡을 신청합니다. 어제저녁 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는 할아버지를 기다리는데, 멀리서 걸어오시는 모습이 너무나 크게 보였어요.” 그 말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멀리 있는데도 오히려 더 크게 느껴진다는 그 말. 세상을 바라보는 익숙한 시각의 틀에서 벗어나면 이렇게 전혀 다른 깊이가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이 익숙한 시각의 틀, 즉 원근법은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에 의해서 처음 체계화되었다. 인간이 신의 시선을 대신해 세계를 질서 있게 재구성하려는 열망에서 태어난 것이다. 소실점을 중심으로 한 원근법은 혼란스러운 현실을 하나의 시점으로 묶어내며 조화와 균형의 감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단 하나의 시점을 절대화하며,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세우는 시선의 질서를 만들었다. 중심에 가까운 것은 크고 명확해지고, 멀리 있는 것은 작고 사라져버렸다.

근대 회화는 이 틀을 깨트리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해 왔다. 피카소는 여러 시점을 한 화면에 겹쳐 세계의 다층적 구조를 드러내려 했고, 인상주의 화가들은 눈의 초점 대신 빛의 떨림과 순간의 공기를 화폭에 담고자 하였다. 추상화에 있어서는 더 이상 소실점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회화는 원근법이 부여한 중심의 질서를 해체하며, ‘보는 행위’ 그 자체를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

왜 화가들은 원근법의 방식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벗어나고자 했을까? 원근법은 단지 그림의 기법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사고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중심을 세우고, 그 중심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정렬하는 이 시각은 우리의 사유 방식에도 깊게 스며들어 있다. 우리는 여전히 가까이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멀리 있는 것은 덜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그렇게 시각의 중심은 곧 사유의 중심이 되었고, 세계는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재정렬된다. 그러나 화가들은 그 중심의 바깥에 있는 세계, 시선이 닿지 않는 세계를 그리고자 했다. 내가 보는 세상이 아니라, 나를 넘어선 세상을 그리려 한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의 시점 안에서 세상을 본다. 하지만 이 익숙한 틀에서 한 발 벗어나면, 여러 층의 다른 세계들이 드러난다. 사물의 크기보다는 마음의 온도가 먼저 느껴지고, 거리보다 관계의 결이 더 또렷해진다. 신청곡의 사연자가 멀리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유난히 크게 보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눈으로는 멀리 있지만, 마음의 초점이 맞춰진 순간, 세상은 다른 깊이로 열린다. 결국, 우리가 보는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세계를 새롭게 느끼고, 우리가 잊고 있었던 따뜻함의 온기를 다시 발견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장훈화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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