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은 모리 데루모도의 우군 4만3000명을 포함한 총 7만5300명이 닷새 동안 성을 공격하였으나 7000여 조선 백성들의 끈질긴 항전에 무려 3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기와 병력의 수에서 절대적인 열세였던 까닭에 마침내 황석산성은 왜군에 의해서 함락되었고, 그들은 분풀이로 백성들은 물론 성안에 남아있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죽여 버렸다.
한바탕 살풀이를 한 그들은 전라도로 곧장 진격하였다. 구례와 곡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8월 17일(음력)에 남원마저 함락시켰고 명나라 장수 양원은 전주성으로 도망쳤다. 가토군은 임진년과 같이 대구와 상주를 지나고 조령을 넘어서 충주에 1만 명이 진을 쳤다. 전주성마저 함락시킨 3만 명의 모리군은 한양으로 북진하기 위하여 천안에 집결하고, 선발대인 구로다가 이끄는 5000명의 왜병은 직산으로 향했다. 이때가 정유년 9월 초(음력)였다.
왜병이 다시 본격적으로 조선정벌에 나서자 7월 중순(음력)에 송내마을을 출발한 천동은 고니시 군영에 있던 예수회 종군신부 세르페데스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2년 전인 1595년 봄에 왜국으로 돌아간 그가 어떻게 다시 조선으로 오게 됐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산이 형의 말로는 그가 분명히 다시 조선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에게 청산해야 할 빚이 있다는 것이 천동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가정을 꾸린 그가 다소 무리를 해서 세르페데스를 쫓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은 어정쩡한 자세로 세상을 살아온 그이지만 이제는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천동과 세르페데스와의 관계정리는 세평과의 관계정리를 위한 시발점이 될 것이다.
지난 5월, 태화강의 상류 지점인 송현마을 앞에서 만난 황어 떼는 그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이제 자신은 이 땅에서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한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고, 머지않아서 그의 분신도 태어날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과거에 대한 정리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세르페데스가 지금은 한양으로 진격하던 선발대 구로다 진영에 있는 것을 알아냈다. 천동은 구로다 군대를 멀찍이서 따라갔다.
정유년 9월7일(음력)에 직산에서 왜군과 명의 부총병 해생이 이끄는 2000명의 명군이 마주쳤다. 그렇지만 그날 전투다운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양쪽의 군대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장수 몇 명이 말을 타고 다가가서 서로에게 말 몇 마디 건네는 게 고작이었다. 양군이 제대로 붙으면 엄청난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걸 서로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명군과 왜군은 상당한 시간 동안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대치하다가 구로다 군의 군세에 눌린 명군이 먼저 수원성으로 후퇴해서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두 군대의 사이에서 전투는 단 일 합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밤 천동은 구로다 진영에 잠입해서 두 시진 만에 세르페데스가 묵고 있는 군막을 찾아냈다.
글 : 지선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