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여름 땡볕 아래 활활 타오르는 백일홍(百日紅)을 보면 꼿꼿한 선비의 강직한 지조가 연상된다. 예로부터 열흘 붉은 꽃이 없다지만 백일홍은 100일 동안 피고지기를 반복한다. 백일홍의 꽃말은 ‘떠나간 벗을 그리워 함’이다. 선비들은 뜰앞의 백일홍을 바라보면서 정다웠던 옛벗과 추억을 되새겼다. 이런 연유로 고택, 향교, 서원, 정자, 사찰, 무덤 등에 많이 심겨졌다.
백일홍은 ‘배롱나무’로도 불렸다. ‘백일홍’이 ‘배길홍’ ‘배기롱’을 거쳐 ‘배롱’으로 변한 것이다. 한해살이 백일홍과 구별해 ‘목백일홍(木百日紅)’으로도 부른다. 자미화(紫薇花), 만당홍(滿堂紅)이라고도 한다. ‘자미(紫薇)’라는 말은 ‘자미원’에서 유래된 것으로 중국의 황제를 상징하는 별자리 이름이다. 그래서 배롱나무를 궁궐에 심기도 했다. 만당홍은 온 집안이 ‘붉은 빛으로 가득하다’라는 뜻이다.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 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석 달 열흘을/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서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 올려/ 목백일홍나무는 환한 것이다.…… ‘목백일홍’ 일부(도종환)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綠)>을 보면 꽃을 총 9품으로 분류했는데, 그 중 매화와 백일홍을 1품으로 분류해 최고의 나무로 쳤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부산 화지공원에 있는 천연기념물 168호로 수령이 800년이나 된다. 수형과 꽃이 아름답기로는 안동 병산서원의 백일홍을 꼽는다. 울진군 백암온천으로 가는 길(88국도)에는 11㎞에 걸쳐 양쪽으로 백일홍이 줄 지어 서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지르게 한다. 4000여 그루의 백일홍 꽃길은 우리나라에서 첫 올림픽이 열린 1988년을 기념해 심어졌다.
울산 인근 표충사에도 백일홍이 많다. 100~200년 묵은 10여 그루가 한여름 산사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고창 선운사, 김천 직지사, 양산 통도사, 구례 화엄사, 하동 쌍계사, 장성 백양사, 서산 개심사 등의 백일홍도 유명하다. 사찰에 백일홍을 심는 것은 출가한 수행자들이 해마다 껍질을 벗는 백일홍나무처럼 세속적 욕망과 번뇌를 벗어 버리라는 뜻이라고 한다.이재명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