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는 23일은 서리가 내리는 상강(霜降). 새벽 찬 기운에 풀잎이나 꽃잎, 나뭇가지 등에 맺힌 것을 이슬이라고 한다면 서리는 이슬이 얼어붙어 하얗게 꽃을 피운 것을 말한다. 서리가 한번 내리면 산천초목이 시래기처럼 시들어버리고, 미처 걷지 못한 농작물은 못쓰게 된다. ‘무서리 세번에 된서리 온다’는 말처럼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덮는 된서리는 묽은 무서리(初霜)가 몇차례 온 후에 내린다. 서리의 위력이 얼마나 센지 기진맥진한 상태를 ‘서리맞은 구렁이’ ‘서리맞은 호박잎’ 같다고 한다. 맵고 야무진 땡초도 서리 한방이면 하루만에 물렁물렁해지면서 색깔이 변한다. 특히 고구마는 순이 거의 녹아버린다. 그래서 권력자의 서릿발 같은 호령을 추상(秋霜)같다고 한다.
고구마를 삶다 보면 제대로 익는지/ 젓가락으로 고구마를 쿡쿡 찔러보게 된다/ 나의 어머니도/ 열 달 동안 뱃 속에서 키워/ 세상에 내놓은 잎사귀도 덜 떨어진 딸년/ 잘 익고 있는지를/ 항시 쿡쿡 찔러보곤 하신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느냐?/ 차 조심해라 겸손해라 감사해라/ 고구마 푸른 줄기처럼/ 휴대폰 밖으로 넝쿨 져 뻗어 나오는 어머니//…/뜨거운 아랫목에서 뒹굴거리며/ 알았다고요 귀찮은 듯 대답하는/ 뜨뜻하게 잘 익어 가는 딸년… ‘고구마를 삶으며’ 일부(서안나)

고구마는 대략 세종류로 나뉜다. 육질이 단단하며 물기가 없는 것은 ‘밤고구마’, 무른 것은 ‘물고구마’, 단호박처럼 속이 노란 것은 ‘호박고구마’라고 부른다. 호박고구마는 TV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대중들에게 제대로 각인됐다. 나문희가 밥상머리에서 아들에게 ‘고구마호박’을 설명하는데 며느리가 계속 ‘호박고구마’라고 교정해주자 그만 고성을 지르고 만 것. 물고구마는 진주 사투리로 ‘물고매’라고 하는데, 1980년대 장학퀴즈에서 이 물고구마가 유명세를 탔다. 이날 퀴즈에서 정답은 고구마였으나 경상도에서 올라 온 이 학생은 사투리로 ‘고매’라고 외쳤다. 차인태 아나운서가 표준어로 유도하기 위해 석자라고 힌트를 줬지만 이 학생이 외친 것은 아니나 다를까 ‘물고매!’였다.
고구마는 땅바닥을 따라 줄기를 뻗으면서 뿌리를 내린다. 한 줄기가 약 3m정도 되는데 각각의 줄기들이 서로 뒤엉키고 설켜 하나의 줄기를 잡아 당기면 엉뚱한 곳에서 고구마가 뽑혀 올라오기도 한다. 요즘 고구마 줄기처럼 많은 범죄자들이 하나의 사건에 연루돼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안 그래도 갑갑한 세상이 더욱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재명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