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계절한담(閑談)(177)]노란 가을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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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계절한담(閑談)(177)]노란 가을의 전설
  • 이재명 기자
  • 승인 2020.11.16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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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 논설위원

11월 중순, 노란 은행 잎이 눈 내리듯 떨어진다. 은행(銀杏)은 열매의 모양이 살구(杏)처럼 생겼고 은(銀) 빛이 난다고 해서 이름붙여졌다. 은행은 은행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기까지 수십년이 걸리기 때문에 공손수(公孫樹)라고도 한다. 할아버지가 은행을 심으면 손자가 그 열매를 먹게 된다는 뜻이다. 실제 은행나무는 30년 정도 지나야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은행 열매는 겉으로 보면 살구처럼 생겨 먹음직하지만 알고 보면 구린내가 이만저만 한게 아니다. 혹 실수로 열매를 밟기라도 하면 하루종일 신발에서 악취가 난다. 그렇지만 대지를 노랗게 물들이는 은행은 그 아름다움이 비길 데가 없다. 여기다 질병과 곤충을 잘 견디고 다른 나무 보다 훨씬 오래 살아 부러움을 산다. 경기도 양평군의 용문사(龍門寺) 은행나무는 나이가 1100~1500살이나 된다.

▲ 청도 운문사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있다. 열매는 암나무에서만 열린다. 지난 1996년 강제규 감독이 만든 영화 ‘은행나무 침대’가 극장가를 휩쓸었던 적이 있다. 1000년 전 가야금을 연주하는 궁중악사(한석규)와 공주(심혜진)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암수 은행나무로 환생, 현세에서 다시 만난다는 내용이다. 반칠환 시인의 ‘은행나무 부부’도 그러했을 것이다. 300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 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모른다.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 되는 것도 이 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 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은행나무 부부’ 전문(반칠환)



대부분 향교와 서원에는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유는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은행나무 아래에 단(壇)을 설치하고 학문을 닦았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을 보면 ‘행단(杏壇)’은 ‘학문을 닦는 곳을 이르는 말’로 풀이돼 있다. 겸재 정선의 그림 중에는 공자와 제자들이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담론을 나누는 ‘행단고슬도(杏壇鼓瑟圖)’라는 그림도 있다.

은행나무는 ‘가을의 전설’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오래 산다. 한 차례 바람에 노란 전설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이재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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