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立冬)이 지나기 무섭게 찬바람이 불고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 노란 은행잎은 이번 주말 쯤이면 길거리에 수북해질 것이다. 이 맘 때가 되면 이효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며’가 생각난다. 낙엽 타는 냄새는 언제 맡아도 구수하고 달콤하다.
-벚나무 아래에 긁어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엣 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낮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자욱해진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요즘 날이 쌀쌀해지면서 ‘불멍’을 즐기는 사람이 늘고 있다. ‘불멍’은 ‘불을 보며 멍 때리는 일’을 말한다. 불멍이 인기를 끄니 물멍, 숲멍, 바다멍, 바람멍도 등장했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에 사람들은 모든 시름을 잊는다.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며’도 일종의 불멍이 아닐까.
지난 2014년 10월27일 서울시청 앞 잔디밭에서 ‘제1회 멍 때리기 대회’가 열렸다. 심박동수를 측정하고 관람하는 시민의 투표수에 따라 누가 더 ‘멍 때리기’를 잘하는지를 평가해 우승자를 뽑았다. 불교에서는 이같은 ‘멍 때리기’와 명상(瞑想 meditation)이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meditation는 의술, 약 등을 뜻하는 medicine에서 파생된 단어다. 그러고 보면 멍 때리기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약이라해도 부적절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단풍 드는 날’ 전문(도종환)
한병철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는 그의 책 <피로사회>에서 현대사회를 ‘피로사회’라고 진단했다. 오로지 성과만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멍들고 있다는 것이다. 낙엽을 태우는 일은 도종환 시인의 말처럼 ‘제 몸 하나씩 내려놓는’ 일이다. 이 황홀한 만추에 한번 쯤 멍 때리기를 하는 것은 어떨른지요.
이재명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