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해방후 혼란의 시기, 울산 이끌 인재들 키워내며 교육에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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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해방후 혼란의 시기, 울산 이끌 인재들 키워내며 교육에 헌신
  • 홍영진 기자
  • 승인 2022.05.0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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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7월12일 제41회 졸업식 때 울산초등학교 가교사에서 찍은 대반 사진이다. 사진 오른편에 문장호 선생이 양복을 입고 서 있고 사진 맨 뒷줄 오른편 학생이 김동규다. 둘째 줄 오른편 맨 끝에 문 선생이 오른손을 어깨에 올리고 있는 학생이 자청 권정식이다. 이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울산초등학교의 정식 명칭은 ‘울산태화공립보통학교’였다.

울산초등학교는 1907년 개교 이래 많은 인재를 배출했지만 그 이면에는 사랑과 헌신으로 봉사한 교사의 노력이 있다.

1950년대 전후 이 학교를 다녔던 학생들 대부분은 문장호 선생을 기억할 것이다. 문 선생은 울산초등에서 근무하는 동안 학생들의 학업증진에 힘썼고 또 문예반을 만들어 학생들이 음악과 미술, 서도 등 취미생활을 통한 인성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6년 울주군 청량읍 문죽리에서 태어났던 문 선생은 일제강점기 면사무소 서기로 일했다. 이곳에서 해방을 맞은 그는 일본인들이 갑자기 떠나자 교사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교육의 현실을 보고 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일제강점기 초등학교 교장은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교사 중에도 일본인이 적지 않았다. 실제로 울산초등학교만 해도 일본인 교사가 많아 이들이 시계탑 사거리에서 가까운 규슈(九州)여관에 숙소를 마련해 놓고 학교를 오갔다.

그런데 해방과 함께 일본인 교사가 갑자기 일본으로 돌아가자 우리나라에는 교사가 부족해 정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상대로 일정 기간 교사 교육을 받도록 한 후 일선 학교에 배치했다.

문 선생은 학생들의 실력을 높이기 위해 시험을 친 후 학업 성적을 도표로 그려 이를 게시판에 붙였다. 문 선생의 이런 교육방식은 자청(紫淸) 권정식(權丁植) 전 제독의 회고록 <바람과 구름 속에 追憶을 묻어놓고>에 잘 나타나 있다. 울산초등학교 41회 졸업생인 자청은 1951년 6학년 때 문 선생이 담임이었다. 당시 6학년은 남자가 대반과 솔반 두 반이었고 여자는 따로 한 반 있었는데 자청은 이중 대반이었다.

자청은 문 선생의 교육 방법과 관련 “문장호 선생님은 엄격해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시고 매일 시험을 보면서 그 결과를 개인별 그래프로 붙여놓아 학생들의 경쟁심을 유발하셨다. 졸업 직전 내 이름 위에 막대 그래프가 제일 높이 솟아 있었다. 그 결과 우리 반은 전국에서도 으뜸가는 중학교 입학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중학교 입학시험은 전국 수험생이 동시에 멘탈 테스트 형식의 국가고시를 치르고 그 성적으로 개인별 선호 학교를 지원하는 최초의 국가시험 방식이었다. 지금의 대입 수능시험과 비슷했다. 나는 성적이 좋아 전국 어느 학교를 지원해도 상위권으로 입학할 수 있었지만 넓은 세상을 알 수 없었던 나는 우리 읍내에서 제일인 제일중학교에 원서를 제출했다.”고 회고했다.

자청에 따르면 당시 대반에서 자신과 1~2등을 다투었던 학생이 김동규였는데 김씨는 나중에 서울대를 졸업 한 후 러시아경제 전문가가 되어 국방대학원 교수가 되었다.

이외에도 대반에서는 나중에 현대화학 임원을 지냈던 이상만, 연세대학을 졸업한 후 산업할부 금융 대표이사 사장이 된 원성기, 그리고 서울약대를 졸업한 후 부산에서 약업으로 성공한 이채우 등 명사들이 많이 나왔다.

자청은 이해 제일중학교 입학시험에서 3등을 했다. 이후 울산농고를 거쳐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던 그는 제3 해역사령관, 해군 교육사령관, 해군대학 총장을 거쳐 해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1951년 울산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울산제일중학교로 진학했던 학생들은 모두 울산제일중 3회가 되는데 제일중학교 3회에는 이들 외에도 심완구 전 울산시장, 권기술 전 국회의원, 오해룡 전 울산시의회 의장 등 정치인과 경제인이 많이 나왔다.

자청은 “현재 서울에서 살아가고 있는 울산제일중 동창생들만 해도 40여 명이나 되는데 초등학교 동창들이 모이면 ‘당시만 해도 울산이 시골이었지만 문장호 선생님의 전인교육 덕분에 우리들이 모범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 요즘도 고마워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문 선생은 진학생들을 상대로 수업이 끝난 후 집으로 데리고 가 따로 공부를 가르치기도 했다. 요즘으로 보면 일종의 과외 수업제도인 이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학업성적을 더 올릴 수 있었다. 당시 문 선생의 집은 학교와 가까웠는데 수업이 끝나면 4~5명의 학생들을 따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공부시켰다.

이때 과외수업을 받은 학생 중에는 나중에 울산 MBC 상무가 되는 최영수와 또 경상일보 창간 때 공무국에서 일했던 박부길이 있다.

문 선생은 특히 산수를 열심히 가르쳐 과외수업생 중에는 산수를 잘하는 학생이 많아 중학교 입학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울산제일중학교 교사들은 울산초등학교 졸업생들이 산수 성적이 다른 학교에 비해 좋다는 얘기들을 하곤 했다.

당시만 해도 울산에는 초등학교가 요즘처럼 많지 않았지만 울산의 명문이었던 울산제일중학교에 얼마나 많은 학생을 입학시키느냐 하는 것이 초등학교 순위를 가늠했다.

당시 중학교 입학시험에는 산수가 큰 비중을 차지해 산수를 잘 가르쳤던 문 선생은 6학년 담임을 주로 맡았다. 문 선생이 산수 못잖게 심혈을 기울였던 과목이 역사였다. 역사 시간에는 특히 을지문덕과 이순신 장군 등 민족 영웅들의 얘기를 통해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심었다.

문 선생의 처남으로 당시 문 선생 집을 자주 드나들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문 선생을 보았던 박수근(87)씨는 “당시 매형은 판잣집에 살면서 교사 봉급이 얼마 되지 않아 누나가 육군 병원에서 나오는 잔반으로 돼지를 키우면서 어렵게 살아야 했는데도 매형이 집에서 따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이들의 뒤치다꺼리까지 하느라고 고생이 많았다”고 회상한다.

문 선생이 울산초등학교에서 근무할 때만 해도 6·25로 부상자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대부분의 울산 학교들이 군에 징발되었다. 이 무렵 울산초등학교는 울산농고에 있었던 제23 육군병원의 분원으로 주로 낙동강 전선에서 부상을 입원 병사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실제로 울산초등학교 41회 졸업생만 해도 6학년 때는 교실이 징발되는 바람에 수업을 학교에서 못하고 일본인이 떠난 뒤 비어 있었던 학교 정문 앞 큰 가건물에서 했다.

문 선생이 훌륭한 교사였다는 것은 제자 고원준 전 국회의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 전 의원은 1990년대 차수명 의원 후임으로 ‘울산 사랑의 전화’ 회장직을 맡은 적이 있다. 이때 고 전 의원은 회장 취임사에서 차 의원을 칭찬하면서 “제가 울산초등학교를 다닐 때 담임이 문장호 선생님이었는데 문 선생님은 우리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자주 우리 반 학생들에게 ‘이놈들아 너희 선배 중 차수명은 부친이 일찍 돌아가 홀어머니 밑에서 공부했는데도 경남중학교에 합격했는데 너희들은 이렇게 공부를 하지 않아 어떻게 좋은 중학교에 갈 수 있겠느냐’고 자주 차 의원을 칭찬했다”면서 “당시 문 선생님은 울산 교육계에서는 실력 있는 선생님으로 소문이 나 우리 반에서 제일중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차 의원은 어린 시절 부친이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그의 어머님이 울산초등학교 정문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다가 나중에 언양으로 가 친정아버지 소유의 박애당 약포를 맡아 약을 팔면서 외동아들 차 의원을 포함 2명의 딸을 서울까지 유학을 보내는 등 자녀들을 잘 키웠다.

울산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의 학업성적을 올리기 위해 이렇게 분투했던 문 선생은 1950년도 말 부산 성남초등학교로 영전이 되었다. 문 선생은 특히 서체가 뛰어나 울산초등학교는 물론이고 성남초등학교에서도 교실마다 붙이는 급훈과 교훈을 붓으로 직접 썼다. 성남초등학교에서도 처음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6학년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이 학교를 떠난 때가 6대 총선 때인 1963년 무렵이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무렵 울주군 온산면 출신으로 6대 총선에 출마했던 김임식이 문 선생에게 도움을 청해 학교를 떠나 김씨의 선거를 도왔다. 김씨는 6대 총선 전 개성중학교 교감으로 있었는데 공화당 후보로 나서면서 기획력이 뛰어났던 문 선생에게 선거 기획을 맡겼다. 김씨는 이후 공화당 정부에서 4선 국회의원으로 부산에 동의대학을 설립하는 등 성공적인 의정활동을 했지만 문 선생은 일찍 김씨를 떠나 부산 문현동에서 살다가 별세했다.

처남 박수근씨는 “매형은 교육계에서 물러난 뒤에도 붓글씨 공부를 열심히 해 서체가 뛰어나 주위 사람들이 개인전을 열라고 여러 번 권유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오직 수도하는 마음으로 혼자 집에서 붓글씨를 쓰다가 돌아가셨다”면서 아쉬워했다.

울산초등학교 교사 시절 문 선생 집은 동편 강당 바로 뒤에 있었다. 집은 기역자 형으로 방이 3칸 있었는데 이중 중간 방에서 과외 수업을 했다. 북정동 재개발로 곧 철거될 운명에 있는 이 집에는 현재 ‘글든 길 12’라는 주소가 붙어 있다. 문 선생이 떠난 후 이 집에는 울산 출신의 극작가 범곡 김태근 선생이 한동안 살기도 했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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