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집된날 바로 전장으로…잠 못자고 싸웠지”
상태바
“징집된날 바로 전장으로…잠 못자고 싸웠지”
  • 차형석 기자
  • 승인 2023.06.23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6·25 한국전쟁 안강지구 전투에 참전한 울산 동구 전하동 최용조씨가 참전용사증서를 들어보이며 치열했던 당시 기억을 들려주고 있다. 김경우기자 woo@ksilbo.co.kr

“밥은 무슨 밥인교……. 전투가 끝나고 우리 소대에는 남은 소대원이 나를 포함해 둘 밖에 없었을 정도로 처절했심더.”

6·25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전 최대 격전지 중 하나로 꼽히는 안강지구(安康地區) 전투에 참전했던 최용조(94·동구 전하동)씨는 당시 전투를 이렇게 기억했다. 안강지구 전투는 국군 수도사단이 1950년 8월9일부터 9월14일까지 경북 안강·포항·경주 일대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의 남진을 저지한 방어전투다. 이 전투로 북한군 제12사단은 낙동강 전선의 동부지역 돌파에 실패했고, 국군 제1군단은 기계와 포항지역 북방으로 후퇴한 적을 추격해 다음 단계의 반격작전으로 이행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일제강점기 경남 울산군 시절이었던 1929년 전하동(당시 전하리) 녹수마을에서 태어난 최씨는 10대 때부터 어선을 타고 멸치잡이 등 어업에 종사했다. 그러다 20대 초반이던 1950년 6월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최씨는 친구, 또래 청년들과 함께 전장에 투입됐다.

최씨는 “6·25가 발발하고 몇 달 뒤에 경남방위대에서 나와 마을마다 젊은 사람들을 징집했고, 나 역시도 친구들과 같이 트럭을 타고 참전하게 됐다”며 “아침에 시내(삼산)에 가서 ‘엎드려 쏴’ 사격 연습과 총 분해·결합법 정도만 배우고 바로 오후에 (안강지구)전투에 투입됐다”고 말했다.

최씨가 전투에 투입됐을 때는 안강지구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는 “처음에 도착했을 때가 오후 4시쯤이었다. 안강들 논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별다른 엄폐물 없이 논두렁에 숨어서 전투를 했었다”며 “소대장이 ‘돌격 앞으로’라고 외치면 총을 들고 일제히 ‘야’ 하고 앞으로 뛰어 나갔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총알이 빗발치고 포탄이 쏟아져 무서웠으나 전우가 옆에서 쓰러져 죽는 모습을 보고, 분노와 용기가 생기면서 죽기 살기로 전투에 임했었다”고 회고했다.

국군과 북한군이 점령과 탈환을 번갈아 했을 만큼 안강지구 전투는 치열했고, 양쪽 사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최씨는 “부상자는 물론 사망자가 너무 많아 제23육군병원(울산농고 위치)은 병실과 시체안치실이 턱없이 부족해 병원 입구 도로가에 시신이 쌓여 있었다”고 했다. 최씨가 속해 있던 국군 8사단 21연대(3대대 1중대 1소대)는 많은 수의 병사들이 전사하면서 사단이 해체되고 결국 6사단 19연대로 편입되기도 했다.

최씨는 “전투가 끝나고 우리 소대에는 나를 포함 둘밖에 안 남았다”며 “나 역시 총알이 왼쪽 허벅지를 스쳐 가면서 부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졌고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최씨는 “전투가 낮밤으로 계속되면서 밤에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잠을 못자 수면부족으로 수시로 땅바닥에 고꾸라지기도 했다”며 “또 수시로 이동을 해야 해서 밥도 먹을 새가 없었다. 배가 고파서 콩을 볶아 주머니에 넣어놓고 허기를 달래곤 했다”고 말했다.

최씨는 안강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밀양 제7육군병원에서 한 달 간 치료를 받은 뒤 다시 전투에 투입됐다. 강원도 화천과 함경북도 청진 등의 전투에 참여했고, 중공군의 포탄 공격에 허리를 다치기도 했다. 이후 치료 후 육군보충대에서 대기를 하다가 휴전 이야기가 나오면서 1951년 6월말께 상병으로 제대를 했다.

최씨는 “제대하고 집에 왔을 때 어머니가 ‘아이고, 우리 용택(집안 이름)이 살아서 왔네’라고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고 했다. 최씨는 이후 결혼을 하고 다시 어업에 종사를 하다가 1970년대 현대조선소(현 현대중공업)가 들어서면서 조선소 막노동, 조경업 등을 하며 4명의 아들을 키웠다. 2008년에 최씨는 뒤늦게 정부로부터 국가유공자 증서를 받고 국가유공자가 됐다.

최씨는 “6·25 한국전쟁 당시 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다는 점을 젊은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아울러 국가유공자에 대한 처우도 보다 더 개선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차형석기자 stevecha@ksilbo.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울산 동구 주민도 잘 모르는 이 비경…울산시민 모두가 즐기게 만든다
  • [울산 핫플‘여기 어때’](5)태화강 국가정원 - 6천만송이 꽃·테마정원 갖춘 힐링명소
  • 제2의 여수 밤바다 노렸는데…‘장생포차’ 흐지부지
  • [지역민도 찾지 않는 울산의 역사·문화명소]울산 유일 보물 지정 불상인데…
  • 울산 앞바다 ‘가자미·아귀’ 다 어디갔나
  • 확 풀린 GB규제…울산 수혜 기대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