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만년필’-송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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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만년필’-송찬호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3.07.10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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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 대가리 눈 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의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 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 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 송은숙 시인
▲ 송은숙 시인

잊혀진 필기구를 통해 반추해 보는 문필가의 삶

컴퓨터가 보편화되고 수첩의 기능을 휴대전화가 대신하면서 만년필을 쓸 일이 잘 없다. 그래도 서랍 속 만년필을 버리지 못하는 건 그것에 얽힌 오랜 추억과 만년필의 상징성 때문이다. 시인도 만년필의 여러 가지 이력을 나열하는데, 사실 이건 글쓰기 혹은 문필가의 모습이나 속성 같은 것이다.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 걸어두기는 몽상가로서의, 말 대가리 눈 화장 해주기나 공원묘지 비명 읽어주기는 밥벌이로서의,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은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빌붙어 아부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인에게 만년필은 고통스럽지만 소중한 기억인, 치열했던 습작 시기를 떠올리게 하는 도구이다.

잉크의 늪에 사는 푸른 악어는 무엇일까. 아직 순치되지 않은, 덤벼들어 물어뜯는 문필가의 저항이나 기개. 그렇다면 만년필의 ‘작고 짧은 삽날’로 악어를 풀어놓을 물길을 팔 수도 있다.

송은숙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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