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사 연밭에 가면 나는 한 마리 코끼리가 된다
연과 연 사이
귀때기 파란 짐승이 내 안에서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온다
허리 구부정한 노스님이 지팡이 짚고 연밭 사이를 거닐고 있다
스님과 코끼리 사이가 보이지 않아서
연잎 위에 올라앉은 청개구리
작은 눈을 말곳거리며
연잎 너머를 바라보는 동안
푸른 보자기로 불 꺼진 진흙밭을 통째로 보쌈하고 있다
그렇게 한 생을 건너겠다는 듯
오래 서서 흔들리면서
진흙 속에서 뽑아낸 부화 직전의 희고 둥근 알
한동안 마음은 발각되지 않는다
희미하게 남은 향기의 자력을 따라
하늘 한 잎 꺾어 들고 연밭을 걸어 나온다
커다란 귀가 펄럭펄럭 허공을 접었다 폈다
서녘 하늘이 천천히 몸을 내려놓고
품에 안은 아픈 모서리들
내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환하게 불 켜진 코끼리 한 마리 가고 있다
꽃이 진 연밭을 밝게 비춰주는 지혜의 빛
팔월도 중순이 지났으니 연꽃은 하마 지고 있고, 꽃 진 자리엔 연밥이 올라와 여물어 가겠다. 그래도 연잎은 아직 푸르고 무성하게 습지를 덮고 있을 것이다.

‘불 꺼진 진흙밭’ ‘희미하게 남은 향기’ 같은 구절을 보니 연꽃이 진 연밭을 배경으로 한 것 같다. 그렇다면 ‘부화 직전의 희고 둥근 알’은 그 결실을 묘사한 것일 테고. 널찍한 연잎은 과연 코끼리의 귀를 닮았다. 진흙밭에서 피는 연꽃이나 풀을 먹는 코끼리나 모두 맑고 청정한 지혜를 상징하니 푸른 연밭에서 코끼리를 떠올리는 일은 자연스럽다.
‘환하게 불 켜진 코끼리 한 마리’는 마음을 밝히는 자등명(自燈明)의 지혜일 것이다.
그럴 때 노스님도 코끼리와 다를 바 없고, 청개구리 같은 미물도 마찬가지여서 ‘연잎 너머’ 영원을 응시하는 중. 송은숙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