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立冬)이다. 비로소 물이 얼기 시작하고, 중순 쯤에는 처음으로 땅이 얼어붙는다. 이 때쯤 들판에는 하얀 된서리가 내린다. 된서리가 한 번 내리면 산천초목이 시래기처럼 시들어버린다. 동면하는 동물들은 땅에 굴을 파고 숨는데, 미처 굴을 마련하지 못하면 그대로 얼어 죽는다. 그러나 이런 시련 속에서도 고고하게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그 이름하여 국화(菊花)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三月東風) 다 지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는다/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조선시대 대제학 벼슬을 지낸 이정보는 시조에도 뛰어나 많은 글을 남겼다. 그 중에서 ‘국화야 너는 어이’라는 시는 선비의 기개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의 키워드인 오상고절(傲霜孤節)은 서리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홀로 꼿꼿하다는 뜻인데, 요즘 우리 사회에 이런 기개가 있는 선비가 과연 몇명이나 될까.
국화는 예로부터 3가지 정신을 가졌다고 했다. 일찍 심어 늦게 피니 군자의 덕(德)을 가졌고, 서리를 이겨 피니 선비의 지(志)를 가졌으며, 물 없이도 피니 가난한 선비의 기(氣)를 가졌다고 했다. 이를 국화의 삼륜(三倫)이라 부르기도 한다.
국화는 서리가 있어야 더욱 빛난다. 서리 속에서 꿋꿋하게 피어야 진정한 국화(사진)인 것이다. 그런데 서리가 빛내는 것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늦가을 단풍이다.
停車坐愛楓林晩(정거좌애풍림만, 수레 멈추고 앉아 늦단풍을 아끼노라니)/ 霜葉紅於二月花(상엽홍어이월화, 서리맞은 단풍이 2월 꽃보다도 더 붉구나)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 ‘산행((山行)’의 일부다. 1995년 11월 서울을 방문한 중국 장쩌민 주석이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던 도중 북악산의 단풍을 보면서 읊어 더 유명해졌다.
흰 구름 맑은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가을에 붉은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 천공(天公)이 나를 위해 뫼빛을 꾸몄으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어라
지리산을 자주 올랐던 남명 조식 선생은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은 사람은 단풍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할 정도로 단풍을 좋아했다. 그는 피아골 단풍에 심취해 三紅沼(삼홍소)라는 시를 남겼다.
이재명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