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 볼은 도깨비 자루라서
여문 도토리가 한 자루
알밤이 한 자루
기름진 잣이 한 자루
나무가 되고
숲이 되고
돌고 돌아 흙이 되지
다람쥐 볼은 볼록볼록 배부른 아기집이라서
비단벌레를 낳고
붉은박쥐를 낳고
하늘다람쥐를 낳고
참수리를 낳고
스라소니를 낳지
우리가 진즉에 지워버린 이름들
순진하고 무구한 다람쥐는
흙도 나무도 숲도
비단벌레도 붉은박쥐도 하늘다람쥐도 참수리도 스라소니도
자기가 낳은 줄 모르고
입안 가득 도토리를 물고 숲으로 가네
함께 살아갈 숲과 생명을 만드는 ‘다람쥐’

볼주머니가 불룩한 귀여운 다람쥐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생태시’다. 다람쥐는 물어 나른 먹이를 어디에 숨겼는지 잊는 경우가 많아서 남은 씨앗은 싹을 틔우고 숲의 일원으로 자라게 된다. 그 숲을 터전 삼아 다른 동물들이 살아간다.
시인은 다람쥐의 볼주머니를 ‘배부른 아기집’이라고 표현하면서, 숲에서 살아가는 것들을 다람쥐가 ‘낳았다’고 했다. 이들이 의지하는 숲이 다람쥐가 숨겨둔 씨앗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런 표현이 과장만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즉에 지워버린 이름들’에서 이 시가 마냥 귀여운 시는 아님이 드러난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살아있음, 현존을 증명하는 행위이다. 반대로 지워버린 이름은 사라져 버림, 부재의 상황이다. 여기에서 다람쥐는 인간과 대척점에 있다. 숲과 생명을 파괴하고 이름을 지워가는 인간과는 반대로 다람쥐는 숲과 생명을 ‘낳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에도 다람쥐는 부지런히 씨앗을 모았을 테고, 봄이 오면 거기에서 싹이 틀 것이다.
그 싹이 생명을 품는 울울한 숲이 되도록 가꾸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비단벌레와 하늘다람쥐와 스라소니와 인간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송은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