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주년 삼일절 앞두고 울산 독립운동가 3인의 후손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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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주년 삼일절 앞두고 울산 독립운동가 3인의 후손들을 만나다
  • 강민형 기자
  • 승인 2024.02.2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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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유공자 후손인 백두일, 최명훈, 최경식씨, 남진석 울산광복회 지부장, 이건욱, 이한모씨(왼쪽부터)가 27일 울산시보훈회관 호국보훈 기념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경우기자 woo@ksilbo.co.kr
매년 삼일절이나 광복절이면 독립운동에 앞장 선 조상들의 희생에 대한 감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한 때에 그친다. 자신은 물론 집안까지 희생하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정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독립운동가가 여전히 적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본보는 제105주년 삼일절을 앞두고 최윤봉·이상개·백봉근 독립운동가 등 울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세 명의 후손들을 만나 독립운동가들의 일생을 듣고,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봤다.



◇만세운동 후 감시·압박의 나날

1919년 4월2일. 이날 언양시장에는 장이 열리지 않았음에도 약 2000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다 돌연 시장 한켠에서 “대한독립 만세”가 울려퍼졌다.

당시 23살이던 최윤봉 독립운동가는 전날 관공서 등사기로 몰래 태극기를 만들었다. 밤새 만든 태극기는 소달구지 위 소나무 가지를 뭉친 나뭇단 사이에 실어 시장 근처 주막으로 향했다. 최윤봉 독립운동가는 장을 누비며 장꾼들에게 “만세운동을 하면 물건이 상할 수 있으니 장을 펴지 말라”고 당부했다. 서울에서 독립운동이 시작된 지 약 한 달만의 일이다. 언양 천도교 교구장이던 김교경 독립운동가가 우여곡절 끝에 독립선언서를 울산으로 가져오는 데 성공하면서다. 최윤봉 독립운동가는 대구형무소로 끌려가 1년6개월을 살았다. 장손인 최명훈(70)씨는 “할머니에게 전해듣기로 할아버지는 2년 넘게 옥중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이 자리엔 당시 10대 초반에 불과했던 이상개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만세를 부르며 조국의 현실을 목격한 그는 나중에 언양청년동맹 회원이자 언양소년단 지도자가 돼 일제의 감시와 압박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다. 아들인 이한모(72)씨는 “일만 터지면 아버지가 끌려가 고문과 매질을 당했다”며 “광복 이후 당부하던 말씀은 ‘제발 나서지 말라’였다”고 회상했다.



◇독립운동으로 가세 몰락

언양의 열기는 이틀 뒤 병영으로 옮겨왔다. 병영청년회 간부 26명 등은 사람들을 모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언양에서 한차례 만세운동이 있은 뒤 병영의 만세운동은 더 격렬했다. 총성이 들리고 네 명이 숨졌다. 수백명이 다치고 순사들에게 잡혀갔다. 병영청년회 간부이던 백봉근 독립운동가도 여기 포함돼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 당시 22살이었던 백 독립운동가는 장독으로 수년을 고생하다 39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손자 백두일(78)씨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 가세가 기울어 거의 몰락한 수준이었다”며 “당시 20~30대 아까운 청년들이 다 잡혀가 모두가 고생을 했다”고 말했다.

최윤봉 독립운동가의 집안은 언양에서 300석 규모의 농지와 일꾼을 거느리던 유지였다. 하지만 형제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후 모든 것을 잃고 만주로 망명했다. 여기서 최 독립운동가의 세 아들이 태어났다. 셋째 아들 최경식(94)씨는 “만주 단동에서 학교를 다니고 거리를 걸었다”며 “해방 후 돌아온 언양에는 아무 것도 없어 갖은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며 살았다”고 했다.



◇‘유공자 서훈’ 정부가 나서야

울산에 다시 터를 잡은 이후에도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은 후손을 남기지 못해 따로 기리는 날조차 없었다.

서훈을 받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먹고 살기 바빴고 많이 배우지 못한 탓이다. 선조가 독립운동가인 줄 모르는 후손들도 상당수다. 언양 교육 확대를 위해 노력한 이규로 독립운동가의 후손 등은 여전히 서훈을 받지 못했다.

이한모씨는 “수년 전 경기도에서 어느 민족연구단체라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게 해줄테니 얼마의 돈을 달라고 했다”며 “그때 직접 나서 대구, 대전 등 전국을 수소문하며 자료를 모아 노무현 정부 때가 돼서야 서훈을 받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후손들은 기념 행사에서 유족들이 들러리로 서는 일이 다반사인 점도 섭섭해 했다. 이들은 기념 행사가 시민이 참여하고 체험하며 분위기를 느끼고 마음으로 공감하는 행사로 바뀌어야한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후손들은 국기 게양을 하지 않고 여행가는 현실을 통탄스러워하며 독립 운동가가 목숨과 가정을 걸고 지켜낸 나라에 대한 마음을 되새겨 달라고 호소했다.

후손들은 모두 보상이 아닌 명예회복과 나라에 대한 마음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남진석 광복회 지부장은 “우리가 이제 바라는 게 뭐가 있겠나”며 “국가와 지자체에서는 학예사 등 인원을 충원해 유공자들의 서훈 문제를 적극적으로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강민형기자 min007@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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