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안현미 ‘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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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안현미 ‘봄밤’
  • 서정혜 기자
  • 승인 2024.03.11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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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고 밤이다
목련이 피어오르는 봄밤이다

노천까페 가로등처럼
덧니를 지닌 처녀들처럼
노랑 껌의 민트향처럼
모든 게 가짜 같은
도둑도 고양이도 빨간 장화도
오늘은 모두 봄이다
오늘은 모두 밤이다

봄이고 밤이다
마음이 비상착륙하는 봄밤이다

활주로의 빨간 등처럼
콧수염을 기른 사내들처럼
눈깔사탕의 불투명처럼
모든 게 진짜 같은
연두도 분홍도 현기증도
오늘은 모두 비상이다
오늘은 모두 비상이다

사랑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조금씩 이방인이 될 수 있다
그해 봄밤 미친 여자가 뛰어와 내 그림자를 자신의 것이라 주장했던 것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변덕스레 찾아온 봄밤

▲ 송은숙 시인
▲ 송은숙 시인

목련이 피어오르는 봄밤. 봄밤은 가로등과 처녀와 민트향과 도둑과 고양이와 빨간 장화처럼 따뜻하고, 싱그럽고, 알싸하고, 조용하고 부드럽게, 동화처럼 온다. 사랑에 빠졌을 때 봄밤은 이렇게 올 것이다. 이때 목련은 그저 피는 게 아니고 피어오른다. 만개 직전의 목련은 꽃송이뿐 아니라 꽃잎 하나하나가 하얀 불꽃 같다. 사랑이 피어오르는 봄과 밤.

양성 모음의 우아함과 너그러움.

하지만 사랑에 빠진 마음은 변덕스럽다. 빨간 등, 사내, 불투명함, 연두와 분홍과 현기증처럼 위태롭고, 난폭하고, 앞이 보이지 않고, 뒤섞여서 어지럽다. 그건 사랑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작은 틈 앞에서도 모든 것은 비상을 선언하고 마음은 혼돈과 혼란과 혼미와 혼동과 혼선으로 스파크가 일어난다.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봄의 색인 연두와 분홍이 초록과 노랑, 빨강과 하양이 섞인 색인 것처럼 사랑도 나의 마음에 네가 들어와 섞인 것. 낯선 사람 속에서 두리번거리는 이방인 같은 것.

그림자를 두고 다투는 미친 여자는 그해 봄밤, 사랑에 빠진 시인 자신이 아닐까. 송은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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