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고명재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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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고명재 ‘둘’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4.04.01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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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늙은 개와 나란히 걸어가는 뒷모습
어쩐지 걷는 게 불편해 보여
옳지 그렇게 천천히 괜찮으니까
올라가서 이렇게 기다리면 돼
어느 쪽이 아픈지 알지 못한 채
둘만 걸을 수 있도록
길이 칼이 되도록
귤을 밟고 사랑이 칸칸이 불 밝히도록
여섯 개의 발바닥이 흠뻑 젖도록



“느리지만 오래도록 함께 발 맞춰 걷는 길”

▲ 송은숙 시인
▲ 송은숙 시인

시를 읽다 오랜만에 마음이 환해졌다. ‘귤을 밟고 사랑이 칸칸이 불 밝히도록’이란 구절을 읽으며 아랫목 이불 속에 발을 넣고 언니들과 귤을 까먹으며 만화책을 보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따뜻한 주황빛, 새콤달콤한 맛, 껍질을 까면 작은 피자처럼 칸칸이 나뉜 동그란 귤. 사랑의 빛과 맛과 모양이 이렇지 않을까.

이 시는 동행에 관한 시이다.

아주 늙은 개니까 오랫동안 키워온, 가족과 다름없는 개일 테고, 그 주인도 개와 함께 늙어 갔을 것이다. 늙은 개와 늙은 사람이 함께 걷는 뒷모습을 생각해 본다.

절뚝거리며, 느릿느릿, 조금 앞서갔으면 상대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지극한 모습을. 황혼에 이른 둘처럼 하늘에는 귤빛 노을이 깔리고, 길에는 둘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을 테지. 그러니까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는 거다. 일찍 도착했을 때 기다리는 건 가슴을 치는 고독과 한기겠지만, 함께 하면 힘들 때 다리쉼을 하며 고갯짓으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 테니. 발이 아파 절름거리고 발바닥이 흠뻑 젖더라도 이 둘의 동행이 오래도록 멀리 이어지기를.

송은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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