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너 달 쯤 집수리 일을 하자 솜씨 좋은 목수라는 소리를 들었다.
집주인들이 품삯으로 주는 돈이나 물품은 모두 에리코에게 가져다주었다. 직접 건넨 것이 아니라 에리코의 방문 앞에 놓아두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에리코는 돈이나 물품에 대해서는 일절 말을 하지 않았다. 문 앞에 놓아둔 물건은 금방 사라졌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는 숙식을 제공받는 하숙생 같은 존재였다.
그래도 좋았다. 매일 에리코를 보는 것만으로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내 방 안에 얇은 여름옷이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가족으로 대접받는 느낌이 들었다. 옷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품에 꼭 안아보기도 했다. 천을 사다가 집에서 직접 지은 옷이었다. 옷감을 사다가 마름질을 하고 재봉틀을 돌리는 에리코의 모습이 떠올랐다. 옷을 만드는 내내 내 생각을 했을 터였다.
한참동안 행복한 상상에 빠져 있던 나는 갑자기 옷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한 번도 접촉해 보지 않은 내 몸의 치수를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나를 생각하면서 옷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나와 키가 비슷했던 마츠오를 생각했던 것이 분명했다. 내가 입을 옷이지만 마츠오 생각을 했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옛 추억에 젖어 눈물을 흘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절망감이 밀려왔다. 섣불리 에리코의 마음을 움직여 보겠다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그러나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기로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나에게는 오로지 에리코 뿐이었다.
한 여름이 되어도 에리코의 마음은 차가운 얼음장 같았다. 그나마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에리코의 가족들이었다. 에리코의 부모는 차가운 에리코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에리코의 딸 유리는 이제 여섯 살이었다. 조선에 있을 때부터 나와 자주 만났던 사이라 서먹함이 없었다. 아직 어린 나이라 그런지 제 아버지 마츠오가 있던 자리에 나를 대신 채워 넣는 것 같았다.
조선에 남겨두고 온 가족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제일 괴로운 것은 유리와 동갑인 아들의 존재였다. 아들과의 즐거웠던 한 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났다. 어려서부터 나고 자란 백운산 자락의 고향산천이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에리코집의 현관에 있는 아까다마석을 쓰다듬었다. 고향에서 건너온 유일한 물건이었다. 조선에서도 유일하게 고향에서 나온 돌이니 한결 마음이 갔다. 특히나 하루 일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현관에 있는 아까다마석이 나를 반겨주는 느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