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지금 만 권의 책을 쌓아 놓고 글을 읽는다
만 권의 책, 파도가 와서 핥고 핥는 절벽의 단애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나의 전 재산을 다 털어도 사지 못할 만 권의 책
오늘은 내가 쓴 초라한 저서 몇 권을 불지르고
이 한바다에 재를 날린다
켜켜이 쌓은 책 속에 무일푼 좀벌레처럼
세들어 산다
왜 채석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고통에 찬 나의 신음 하늘에 닿았다 한들
끼룩끼룩 울며 서해를 날으는 저 변산 갈매기만큼이야 하겠느냐
물 썬 다음 저 뻘밭에 피는 물잎새들만큼이야
자욱하겠느냐
그대여, 서해에 와서 지는 낙조를 보고 울기 전엔
왜 나 채석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자연이 빚은 채석강 만권의 책과 낙조에 감응
변산반도에 있는 채석강은 그 모습이 수많은 책을 쌓아 놓은 것 같다고 하여 책바위라고도 한다. 그 기이한 모습에 시인 묵객치고 채석강에 홀리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아주 오래전 필자도 저 책에 신세를 진 적이 있다. 물때를 모르고서 넋을 놓고 고서의 부피와 서가의 뒤편을 탐하다가 시시각각 밀려드는 밀물을 만났을 때, 책들이 사다리와 징검다리가 돼 주어 무사히 뭍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 공포와 환희로 채석강은 필자에게 신생의 공간이고 가끔 찾아가서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비밀스러운 장소이다.
2016년 작고한 시인도 채석강에 홀렸나 보다. 퇴임 후 격포에서 생활하면서 이런 절창을 남겼다. 채석강의 만권 책에 압도되어 자신을 ‘좀벌레’라 칭하지만, 자연의 오래된 서고는 만금으로도 바꿀 수 없으니 보기만 해도 배부를 것이다. 게다가 책의 다비식을 치를 만큼 장대하고 아름다운 채석강의 낙조라니. 구름을 켜켜이 물들이며 퍼져가는 낙조는 하늘에 펼쳐진 또 다른 만권 서책이다. 저 서책에는 어떤 사연이 필사되어 있는가. 봉인된 서책을 다 읽어내기까지, 그 수많은 사연에 감응하기까지 시인은 기꺼이 채석강변에 묶여 있다. 송은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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