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36]]5부. 조선인 다케시 (1) - 글 : 김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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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붉은 도끼[36]]5부. 조선인 다케시 (1) - 글 : 김태환
  • 이형중
  • 승인 2024.07.0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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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코 집의 현관에 놓여 있는 아까다마석은 내 혼자 향수를 달래는 돌이 아니었다. 에리코의 아버지는 특히나 아까다마석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축구공처럼 둥글게 가공된 아까다마석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일장기의 붉은 태양을 보는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일본인들이 아까다마석을 좋아하는 이유가 꼭 악귀를 물리친다는 것 보다는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에 들어있는 태양문양 때문인 것 같았다. 일본인들은 전쟁에 패했지만 한 때 세계를 제패하려했던 향수에 젖어 사는 것 같았다.

그들은 다시 제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지 몰라도 실현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다시 일본인들이 세계를 제패하는 세상이 오더라도 그 앞에서 편안한 삶을 추구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에리코라면 문제가 달랐다. 에리코가 가는 세상이라면 어떤 국가라도 상관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나는 점점 일본인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먹는 음식조차도 일본식으로 입에 맞추어 나갔다. 냄새나는 청국장을 앞에 가져다 놓으면 코를 쥐고 자리를 피할 것 같았다. 한 번은 저녁상에 신 김치가 올라왔다. 에리코가 나를 위해 멀리 있는 한국인 가정에서 얻어 온 것이었다. 나는 몇 번 집어먹어보고는 더 이상 먹지 않았다.

에리코가 그런 나를 유심히 건너다보았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조선의 가족이 그리워 김치를 먹으면서 눈물이라고 쏟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내 기억 속에서 조선이라는 나라는 지워져갔다. 나는 서서히 일본인이 되어갔다. 일본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단지 에리코가 일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라니 민족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에게는 다 소용없는 것 들이었다. 오로지 에리코. 에리코 뿐이었다.

그러나 에리코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단단히 마음의 빗장을 닫아버리는 것 같았다. 그런 시간이 오 년쯤 지나자 에리코의 아버지가 더 고민이 깊어지는 것 같았다. 머슴처럼 헌신하고 있는 조선인 남자를 집에 두고 새 사위를 들이기도 면목이 없는 일이었다. 들인다고 해도 마땅한 남자가 없었다.

주위에는 온통 혼자 사는 여인들로 넘쳐났다. 그 중에 에리코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하나코라는 여자가 있었다. 남편이 전쟁 전에 만주에 근무하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전쟁미망인이었다. 에리코처럼 딸을 하나 키우고 있었다. 딸아이는 제 아비의 얼굴도 보지 못한 유복자였다.

하나코는 에리코와 그렇게 친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집에는 자주 드나들었다. 하나코가 집에 찾아오면 대부분 에리코의 아버지가 상대해 주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일어날 수 있는 어려운 일들을 에리코의 아버지와 상의하는 것 같았는데, 내 눈에는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내 예감이 적중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에리코의 아버지가 나를 몰래 만나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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