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37]]5부. 조선인 다케시 (2) - 글 : 김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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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붉은 도끼[37]]5부. 조선인 다케시 (2) - 글 : 김태환
  • 이형중
  • 승인 2024.07.0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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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만나기도 전에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했다. 그래도 에리코의 아버지라 무시할 수 없어 집 밖에서 만났다.

“다케시. 자네를 위해서 진심으로 하는 말일세. 지금처럼 지내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가? 그래서 말인데 하나코를 어떻게 생각하나?”

예상했던 일이라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내가 여자가 없어 조선을 등지고 일본에 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새 여자를 만날 생각이었다면 일본에 건너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는 오로지 에리코 뿐이었다.

“저 때문에 불편하신 건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대로가 좋습니다. 저를 내치지만 말아주십시오.”

에리코의 아버지는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었다. 그 날 이후로 에리코의 아버지는 나에게 여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나코라는 여자도 발길을 끊었다. 그 후로 동네 여자들 사이에 내가 성불구자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거기에 대응하는 사람이 없자 소문은 얼마 가지 않고 시들해졌다.

일본에 건너온 지 오 년 만에 조선에서 큰 전쟁이 일어났다. 그전에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져 복잡한 상황으로 돌아가더니 기필코 전쟁까지 터지고 말았다. 하카다의 조선인들 사이에도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재일 조선인들의 대부분은 조총련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남쪽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다.

 

전쟁은 삼 년을 끌더니 결국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지리멸렬한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결말을 낼 것 같으면 왜 전쟁을 시작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전쟁 때문에 덕을 본 것은 일본이었다. 조선에서 전쟁이 끝나고 나니 일본에는 모든 일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전쟁 후에 부서진 집을 수리하던 사람들이 그 집을 허물고 새집을 짓기 시작했다. 집을 짓는 기술자들이 부족했다.

집짓는 사업을 해보자고 먼저 제안 한 것은 에리코의 아버지였다. 내가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헌 집을 사서 부수고 새 집을 지었다. 몇 해 그렇게 집짓기를 하다 보니 제법 살림이 윤택해졌다. 무엇인가 부족한 듯 우울했던 집안에 활기가 돌았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 하나는 집안 식구들 모두 나선 소풍이었다. 하카다에서 가까운 강으로 온 가족이 함께 여행을 갔다. 에리코의 아버지와 나는 진짜 장인과 사위처럼 다정하게 텐트도 설치하고 낚시도 함께 했다. 유리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에리코와 곤충채집을 한다고 잠자리채를 들고 숲속을 뛰어다녔다. 누가 보아도 모자람이 없는 가족의 오붓한 한 때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나와 에리코는 나무랄 데 없는 부부 사이였다. 나는 그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이 생이 이렇게만 끝난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에리코도 가끔씩 집안일을 결정할 때 나의 의견을 물어오곤 했다. 둘 사이에 같은 방을 쓰지 않을 뿐 엄연한 부부 사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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