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리는 제 친아버지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린 것 같았다. 가끔씩 유리가 나의 친딸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유리는 그림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어려서부터 미술공부를 했다. 더러 나에게 그림 그리는 걸 도와달라고 했는데 나는 그림에 별로 소질이 없었다.
유리는 조선에서 있었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그곳에 관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내가 그릴 수 있는 조선에서의 그림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신불산과 가지산 그리고 고헌산에서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높은 산능선의 흐름과 대곡천을 흐르는 맑은 물이 기억에 떠오르는 전부였다.
“정자가 있었잖아요?”
“그렇지. 백련정이었어. 강가에 있었는데 참 아름다웠지.”
나는 까맣게 잊고 있던 백련정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자의 모습은 눈앞에서 보는 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바로 그곳이 에리코를 처음 만났던 곳이었다. 그런 장소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였다. 백련정을 떠올리자 다시 한 번 가슴이 마구 뛰었다. 급기야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아아! 에리코.’
나는 유리가 건네준 도화지 안에 백련정의 풍경을 그려 넣었다. 정자를 그리고 나서 옆에 서 있던 늙은 소나무와 정자 앞을 흐르던 대곡천 푸른 물도 그려 넣었다. 그러나 정자 안에 있는 에리코의 모습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난감했다. 나머지는 유리가 직접 그리라고 도화지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다른 도화지를 달라고 했다.
내 안에서 몸부림치던 그림들이 깨끗한 도화지 안에서 살아났다. 부족이 울타리를 치고 생활을 하며 서로 다른 부족들이 연합을 하고 혼인을 하며 계곡에 물이 흐르고 큰 바다에서는 고래를 잡는 그림이었다. 유리는 미친 듯이 몰입해 그림을 그리는 내 모습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그림이죠?”
“음. 이건 아주 예전에 조선 사람들이 바위에 그렸던 그림이란다.”
“아. 너무 멋있어요. 나도 그려보고 싶어요.”
유리는 내가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어린아이답지 않게 진지해 보였다. 그 후에도 유리는 내가 그렸던 암각화 그림을 자주 그렸다.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다. 에리코의 아버지는 내 의견을 존중해 사업체 이름을 나에게 맡겼다. 나는 회사 이름을 대곡건업으로 지었다. 고향의 산천을 적시고 흐르는 대곡천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일본에 건너온 지 20년 만에 한일수교가 이루어졌다. 내 나이 48세였다. 대곡건업은 이미 지방에서는 이름 있는 건설회사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민단의 간부가 회사로 나를 찾아왔다. 조국의 재건사업에 투자를 해달라고 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한국의 상황이 안 좋다는 것과 새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재건을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는 설명을 했다. 나는 민단사람들을 돌려보낸 뒤 오랜 장고의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