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곡건업의 대표자가 내 이름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인 주인은 에리코의 아버지였다. 회사 경영은 거의 내 의견대로 했지만 큰돈의 지출은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대곡건업을 세우기 전부터 돈 쓰는 일은 하지 않았다. 목수 일을 해서 벌어오는 푼돈조차도 모두 에리코에게 가져다주었다. 나를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처음엔 입은 옷이 다 헤지도록 사 입지 않았다. 그러자 보다 못한 에리코가 옷감을 사다 직접 지어주기도 하고 기성복을 시장에서 사다 주기도 했다. 심지어는 이발도 에리코의 명령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주머니에 이발비 조차도 넣어 다니지 않았다. 에리코가 이발비를 건네주며 가라고 해야 이발소에 다녀왔다.
유치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에리코와 좀 더 밀접해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내 몸에 필요한 모든 지출은 에리코의 몫으로 돌려놓은 것이었다.
민단에서 사람이 왔다는 이야기를 에리코의 아버지에게 했더니 무조건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라고 일임했다. 나는 또 그것을 핑계로 에리코에게 물었다. 에리코도 조선의 어려운 사정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도움을 주자는데 반대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액수를 정하는 일은 전적으로 에리코의 의견에 따를 생각이었다.
에리코의 방에서 다탁을 사이에 놓고 정좌를 하고 마주 앉았다. 에리코가 따라주는 차 한 잔을 다 마시고 나서 이야기를 꺼냈다. 조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아주 민감한 것이었다. 에리코에게는 결코 유쾌할 수 없는 조선에서의 아픔을 환기시키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확신하건데 에리코의 기억 속엔 아직까지 마츠오가 장승처럼 버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일이라면 당신 마음대로 하셔도 돼요.”
“나는 당신의 허락 없이 단 한 푼도 쓸 수가 없소.”
지금까지 나를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써보지 못한 나였기에 정말로 내 마음대로는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에리코는 이야기 끝에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이제 회사를 정리해서 내 몫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나는 그야말로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에리코와 오붓하게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는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려던 작은 꿈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차라리 현해탄에 몸을 던져 죽으라면 죽었지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다. 그것으로 둘의 대화는 끝이었다. 나는 민단의 요구 따위는 없었던 일로 마음을 굳혔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한동안 냉기류가 흐르자 에리코의 아버지가 나섰다. 내가 민단사람들을 만나지도 않겠다고 하자 자신이 나섰다. 에리코의 아버지가 만류하는 나를 놓아두고 방한하는 경제교류단에 끼어 한국에 다녀왔다.
한국에 다녀온 에리코의 아버지는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30명의 방문단이 경주관광을 마치고 울산이라는 곳에 들러 중화학 공업을 일으키려는 한국정부의 설명을 듣고 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