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리의 동생이라니? 지금까지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네 어머니에게 말을 해 보았니?”
“했었지요. 한 번도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요. 저는 이제부터 열심히 아이를 낳을 거예요. 갖지 못한 동생 대신에요.”
에리코는 내 등 뒤에서 유리의 말을 듣고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나는 그때만큼은 에리코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에게까지 아픔을 안겨줄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유리는 결혼식날의 다짐처럼 결혼하자마자 아이부터 낳기 시작했다. 첫 아들을 낳고 연달아 두 살 터울로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낳은 아이가 여섯이었다. 아들이 넷이고 딸이 둘이었다. 딸 둘은 신기하게도 저희 외할머니인 에리코를 닮았다. 에리코와 나는 외손주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에리코는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유리의 아이들이 에리코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리코의 아버지는 내가 환갑이 되던 해인 1978년에 81세로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 임종 자리에서 나와 에리코를 나란히 앉혀 놓고 두 사람의 손을 꼭 쥐었다. 입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 말은 하지 못했다. 마지막 남은 혼신의 힘으로 나와 에리코의 손을 서로 마주 잡게 했다.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에리코에게 마지막 애원을 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마주 잡은 손을 덮고 있던 손에 힘이 빠지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에리코는 아버지의 주검 앞에 오열했다. 끝까지 부모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는 죄책감 때문인 것 같았다. 나도 진심으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을 흘렸다. 일본생활에서 든든한 내 편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난 에리코는 많이 변했다. 같이 방을 쓰지는 않았지만 말을 거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밖에 나들이를 나갈 때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마지막으로 남긴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나는 에리코와 손을 잡는 것만으로 기쁨이 넘쳐났다. 잠자리를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늦은 나이에 신혼생활을 시작한 듯했다.
어느 따듯한 봄날이었다. 벚꽃이 거리마다 활짝 피어나 천지는 새 세상이 열린 듯 화사했다. 에리코와 나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일본에 처음 건너왔을 당시 에리코 아버지의 부탁으로 둘이 이야기를 나누러 갔던 바로 그 공원이었다. 3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고 나니 공원의 모습도 많이 변해 있었다. 그 때 당시에 사람 키만 했던 어린 벚나무가 아름드리 고목이 되어 무성한 꽃을 달고 있었다.
에리코와 나는 벚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두 손을 맞잡은 채였다. 나는 손바닥에 전해져 오는 촉감만으로 온몸이 공중에 붕 떠있는 듯했다. 고개를 돌려 에리코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에리코도 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세월의 흔적이 남기는 했지만, 그 옛날 대곡천 백련정에서 처음 보았던 그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