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택시기사는 오자마자 떠나려니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개울 건너편 너럭바위를 가리키며 저곳에 공룡발자국도 있는데 가보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도 더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요 위에 백련정이라는 정자가 있지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택시기사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는 내가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아리송하다는 표정이었다. 혹시 예전에 이곳에 와 본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천전리 각석에서 상류로 오백 미터쯤 올라가면 대곡천이 다시 한 번 갈라진다. 왼쪽으로 가면 구량과 인보로 갈라지고 오른쪽으로 가면 전읍과 미호로 갈 수 있다. 미호로 가는 하천이 태화강에서 제일 긴 미호천이다. 택시기사는 앞으로 이곳에 댐이 생길 예정이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백련정도 물에 잠기게 된다고 했다.
택시를 타고 가니 갑자기 백련정이 눈앞에 딱 나타났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장소였다. 예전에 굽어있던 소나무가 사라지고 입구 옆에 꼿꼿한 소나무 한 그루가 백련정을 지키고 서 있었다. 정자의 모습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정자의 난간 위에 에리코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50년 동안 내 마음 속에 뜨거운 태양처럼 버티고 있던 풍경이었다. 화사한 기모노 차림의 에리코가 활짝 웃고 있었다. 파리한 얼굴에 볼우물이 움푹 들어간 모습이 오십 년 전과 똑같았다. 그러나 이미 마츠오의 곁으로 떠나간 사람이었다. 택시기사가 차에서 내려 정자로 올라가 볼 것인지 물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 돌계단을 올라갈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창문을 내린 상태에서 오래도록 정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난 5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50년 전의 젊은 에리코의 얼굴 위에 임종 전의 모습이 자꾸 겹쳐보였다. 지금 에리코는 어디에 있을까? 사후세계라는 것이 있어 생전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틀림없이 마츠오와 함께 있을 것 같았다. 임종 전에도 마츠오를 찾았으니 분명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정말 사후세계가 있다면 나는 죽어서 어떻게 그들을 만날 것인가? 에리코가 마지막으로 마츠오를 찾는 순간 나는 평생 감추고 살았던 치부가 순식간에 드러나는 것 같았다.
백련정 난간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유연한 자태로 난간에 서 있던 에리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댕기머리를 한 어린 소년이 나타났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소년이었다. 갑자기 발 아래가 푹 꺼지는 것 같더니 다리가 휘청거렸다.
아! 어떻게 이름조차 생각이 나지 않을까? 한 때 나의 분신과도 같았던 아들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다니. 그러고 보니 50년 동안 일본에서 살면서 단 한순간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매정하고 못된 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