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일 찾은 동구 방어동 ‘동진해녀의집’. 해녀들이 막 물질을 마치고 나와 투박한 칼로 미역을 손질하고 있었다. 막내인 74세 김임생씨는 물통에서 꺼낸 미역을 정성스럽게 빗어 좌판에 깔고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품 안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양이지만 갓 따낸 신선한 미역순을 찾는 방문객들이 있어 좌판에 내놓는 족족 팔려 나갔다.
동구 앞바다에는 봄만 되면 파도를 맞아 식감이 더 쫄깃한 돌미역이 자란다. 미역이 특히 유명한 주전의 해녀들은 이맘때가 되면 쉴새 없이 올라오는 미역을 손질하고 말리느라 여념이 없다. 이는 동구의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미역을 수확하고 나면 그 자리는 멍게의 차지다. 발을 담그기 무서운 겨울에도 바다에 나가면 성게알(우니)을 딸 수 있어 일 년 내내 일을 쉴 수 없다.
제주도 출신으로 1970년 취업한 남편과 함께 육지로 온 김임생씨는 50년째 물질을 하면서도 여전히 바다에 나가기 전 청심환 등 약을 꼭 챙긴다고 했다. 수십 년째 익숙한 곳을 다른 해녀들과 함께 다니고 있지만 워낙 변수가 많은 일터의 특성상 사전 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해녀의 일과는 대개 오전 6시30분부터 시작돼 낮 12시께 마무리 된다. 한 통 가득 미역과 성게, 소라, 해삼 등을 싣고 나와 방문객들에게 판매하고, 남는 것은 인근 횟집에 넘긴다.
수확량에는 매일 변동이 있지만 2025년 기준 동진항에 남은 약 15명의 해녀들은 이렇게 번 돈으로 둘 이상의 자녀들을 모두 키워냈다.
후배가 한동안 없어 막내 생활을 오래 겪었다는 김씨는 최근 해남 후배를 들였다.
대왕암공원 앞바다에서 60년 가까이 해녀일을 하고 있는 이옥선(79)씨도 제주가 고향이다. 바다가 가까워 매일같이 놀다보니 자연스럽게 잠수를 배웠고 해녀일을 시작했다. 19세때 가족과 함꼐 울산으로 넘어와 제주서 배운 방법을 살려 지금의 작업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후 한 차례 세대교체가 진행돼 어느덧 이씨는 동료 해녀들 중 맏이가 됐다.
매일 나가는 바다지만 여전히 끝을 알 수 없는 시커먼 바닷속은 만만치가 않다. 자칫하다 어선들이 쳐둔 그물을 모르고 덮어 쓰게 되면 그대로 갇혀 빠져나올 수 없다. 위험한 곳을 잘 구분할 수 없는 어린 해녀들의 경우 더욱 위험이 크다. 때문에 최소 4~5년가량은 훈련을 해야 어느 정도 숙련된 해녀로 불리게 된다.
이씨는 “해녀일은 배우기도 지속하기도 어렵지만, 노력한만큼 수확이 돌아온다. 바구니 가득 물건을 채워올 때 보람도 커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며 “해녀 후배들이 더 많아지고 울산 앞바다도 제주처럼 해녀산업이 활성화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일터의 상황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최근 수온 변화로 입수가 어려워지고, 수확량도 줄면서 수익 역시 감소했다.
김씨는 “이전에는 갯물에 들어갈 때 겨울에도 그렇게 차갑다 느끼지 못했는데, 요즘 수온이 변해 조금만 기온이 떨어져도 발이 시렵다”면서 “맺히는 물건도 급감해 거의 3분의1수준으로 수입이 줄었다”고 토로했다.
수입 감소와 해녀 인구의 고령화로 동구의 등록 해녀는 매년 감소하고 있다. 동구에 따르면 지난 2020년 기준 201명이던 해녀가 지난해 159명으로 4분의1가량 줄었다.
동진에서 만난 한 해녀는 “제주의 경우 은퇴한 해녀들에 매달 50만원씩 연금을 주고 병원비를 지원하는 등 제도가 잘 마련돼 있는 것에 반해 울산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라면서 “매일 물질을 하다보니 몸이 상해 휴일마다 병원에 누워있게 돼 갈수록 병원비 부담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은정기자 k2129173@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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