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에서의 휴전을 놓고 조선은 배제한 채 명나라의 유격장 심유경과 왜국의 고니시 유키나가와의 강화회담이 지루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1594년 4월13일(음력) 울산의 서생포 왜성에서 사명당과 가토 기요마사가 만나서 1차 서생포 회담을 한 이후 3차 회담까지 진행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영과는 달리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은 불교를 믿는 불자들이 많았으며, 가토 역시 불교 신자여서 왜국진영이 신뢰할 수 있는 승려의 신분인 사명당이 조선의 강화교섭 대표로 선발되어 서생포 왜성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는 울산 웅촌에 있는 원적산(정족산)의 운흥사(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에 머물면서 서생포 왜성을 오가며 회담을 하였다.
가토는 히데요시가 지시한 5개 항의 요구사항에 대한 조선의 입장을 물었으며, 사명당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조선을 놓고 서로 간의 이익을 포기하지 못하는 양국의 회담은 회담 진행자들 간의 치열한 수 싸움이 계속되었지만, 여전히 결론을 내지는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산에서 칡을 캐기 좋은 이월이 되었다. 양지바른 동해바다 쪽의 산등성이에는 냉이나 달래 등의 봄나물이 나기 시작했다. 천동은 칡 캐기에 열중했고, 국화는 산나물을 채취했다. 계곡마다 가재는 이미 씨가 말라있었다.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도 남김없이 잡아가서 계곡물이 내려오는 도랑에서는 더 이상 먹을 만한 것을 구할 수가 없었다.
1595년 2월18일(음력)에 동굴에서 불과 한 식경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달령에서 의병장 윤홍명이 이끄는 의병들과 그곳을 넘어서 경주로 가려던 삼백여 명의 왜병들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자는 응시, 호는 화암으로 파평윤가인 의병장 윤홍명은 송내 출신으로 천동과는 어려서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천동은 그에게 직접적으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었으며 다른 양반 자제들과는 달리 그는 천동을 은근히 감싸주기까지 하였다. 천동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이곳에 출몰하는 왜군들은 서생포 왜성에 있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수시로 병선을 타고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왔었는데, 군량미 조달과 해로를 거쳐서 경주로 직행하는 교통로 확보가 목적이었다. 달령고개는 원지에서 양남과 양북으로 북상하는 관로가 있던 곳으로 경주와 울산의 동쪽바다를 잇는 중요한 교통 요지였기 때문이다.
달령이 교통의 요지가 된 이유는 바로 무룡산에서 관문산까지 동대산맥을 이루는 지세의 험난함에 있었다. 비록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등성이를 타고 이동하면서 보면 좌우 산비탈의 경사가 심해서 보통 사람들은 싸움은커녕 산을 오르기도 쉽지가 않은 곳이다. 따라서 무룡산에서 관문산에 이르는 동대산맥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자연산성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런데 관문산 쪽은 기박산성과 건흥사가 있는 곳이라서 왜적들은 그곳을 기피했다. 그러다 보니 유일하게 넘어지지 않고 산을 오를 수 있는 곳이 달령으로 이어지는 길이기 때문에 왜적들은 배를 타고 동해안으로 이동하여 대방천을 거슬러 올라서 그곳으로 자주 쳐들어온 것이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