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9월18일자 경향신문은 ‘朴寬洙 노인회 회장’이라는 제목과 함께 ‘대한 노인회 박관수 회장이 부산 거제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 발인은 19일 상오 10시 자택이고 장지는 울주군 청량면 율리’라는 부고 기사를 실었다.
울산 사람들은 강동 어물리 출신인 금계가 왜 고향에 묻히지 않고 율리에 산소를 썼을까 하고 궁금해 했다. 이에 대해 문중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금계의 아들 래창 부부가 금계 죽음을 앞두고 지관과 함께 명당을 찾아 나섰는데, 지관이 현재 금계 산소가 있는 산지를 울산 최고 명당이라고 말해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고 밝혔다. 금계 산소는 현재 울주군 청량읍 율리 망해사지 동편 영취산 자락에 있다. 울산과 부산을 연결하는 7번 국도에서 약 500m 거리다.
해방 전후 울산 출신 교육자로는 최고 영예를 누렸던 금계는 이렇게 명당에 묻혀서인지 후손이 발복해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1897년 어물동에서 태어났던 금계는 울산보통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거쳐 동경제대 철학과를 수료했다. 이후 귀국 대구사범 교사를 시작으로 1939년에는 경기여고 교장을 지낸 후 총독부 장학관이 되었다. 해방 후에는 경북대학교 법정대학장을 역임하고 잠시 울산농고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우리나라 국민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초등학교 교장까지도 일인이 맡도록 했는데, 당시 한국인이 경기여고 교장과 총독부 장학관을 지냈다는 것은 최고의 영예였다. 해방 후에는 이 때문에 친일파로 몰려 반민특위에 불려다니면서 고생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구사범 제자다. 이런 인연으로 박 대통령 시절에는 반공연맹 이사장을 지내면서 박 대통령이 통치 원리로 삼았던 안보우선 논리를 명확하게 제시해 박 대통령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금계는 생전에 아들 래창과 딸 래경을 두었다. 래창은 연세 공대 졸업 후 전기 충전공장인 ‘풍양사’를 언양에 차려 돈을 많이 벌었다. 그는 부인 이자원씨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다. 이 중 둘째 정원이 유한공전 교수를 지냈다.
수도여사대(현 세종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래경은 모교인 서울사대 교수였던 윤용학과 결혼 1남 4녀를 두었다. 장녀 덕경은 모교인 이화여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후 한국여성정책연구소 선임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둘째 옥경 역시 이화여대 졸업 후 미국 유학을 다녀와 경기대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셋째 혜경은 서울의대를 졸업, 서울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넷째 미경은 덕성여대를 거쳐 서울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후 디자인 관련 개인 회사를 운영하면서 성균관대 의류학과 교수를 지냈다. 외아들 재윤은 중앙의대를 졸업 일산에서 안과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율리 산소에는 장남 래창 부부의 묘도 함께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지역사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