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성제의 독서공방]곡예에 빠지다
상태바
[설성제의 독서공방]곡예에 빠지다
  • 경상일보
  • 승인 2023.03.20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설성제 수필가

동네 공터에 서커스단이 왔다. 천막이 쳐지고 무대도 세워졌다. 첫날부터 억수비가 내렸다. 천막귀퉁이는 찢겨 비바람이 안으로 몰아쳤다. 쑤셔놓은 벌집마냥 구경꾼들이 왁작거리고 땀 냄새 범벅이었지만 무대 위는 생전 처음 맛보는 공연이 벌어졌다. 따라붙은 드럼과 기타 그리고 북, 장구는 웬 말인가. 아마 줄타기, 공중그네, 원숭이 재주부리기 등에 음악을 불어넣기로 했던 모양이다. 나는 정말 두 눈이 핑글핑글했다. 딱딱 맞아떨어지도록 공중그네 낚아채는 몸짓이나, 흔들흔들 공중에 가로놓인 줄을 맨발로 건너가는 모습에 마른침이 꼴깍꼴깍, 숨이 멎는 듯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의 연습이 있었을까. 앞뒤좌우 한 치 빈틈없이 진행되는 3일간 곡예가 한순간처럼 지나갔다.

아직도 축축하고 아련하고 그립고 사라지지 않는 이 기억의 이유가 3일 내내 내렸던 비 때문일 거라고 생각을 덮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 스스로에게조차 숨겨놓고 싶을 만큼 보물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 말할 수 없는 하나하나의 묘기, 공식처럼 똑 떨어지는 시간과 공간의 활용, 너무나 멋있는 배경이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음악이 하나가 되어 거기 벌집 속 벌들의 숨을 모두 죽여놨던 것이다. 나는 어쩌면 살아있는 동안 그 곡예를 못 잊을 것 같다.

김만년 수필가의 수필집 <사랑의 거리 1.435미터>(지식과감정 펴냄)에는 그 서커스단이 보여주었던, 눈을 뗄 수 없는 곡예가 춤춘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수없이 다듬고 다듬었을 문장들이 곡예를 벌인다. 나는 천막을 치고 비를 준비하여 문장곡예의 책장을 펼친다. 연두, 노랑, 빨강, 검정 펜을 준비하고 사전도 준비하여 천막 속으로 기꺼이, 기꺼이 들어간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그 날의 서커스를 다시 보는 것 같다. 문장의 곡예단이 아니더라도, 노련한 글쟁이가 아니더라도, 흉내를 내보지도 않아도, 그냥 보고 읽기만 하여도 마음 안에 쑤셔 놓은 벌들은 이미 오래된 아름다운 꽃향기를 향해 비행했을 것이다. 설성제 수필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울산 곳곳 버려진 차량에 예산·행정 낭비
  • [지역민도 찾지 않는 울산의 역사·문화명소]울산 유일 보물 지정 불상인데…
  • 확 풀린 GB규제…울산 수혜 기대감
  • 궂은 날씨에도 울산 곳곳 꽃놀이 인파
  • [기고]울산의 랜드마크!
  • 이재명 대표에서 달려든 남성, 사복경찰에게 제압당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