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손택수 ‘머뭇거릴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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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손택수 ‘머뭇거릴 섭’
  • 경상일보
  • 승인 2024.04.1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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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에 빗방울이 지문을 찍는다
두드린 자국 자국 흙알갱이들이
엉킨다
마당귀 보리수나무 잎사귀와
잎사귀가
붙어 있다, 떨어진다
그때 반짝, 일어나는 빛이
박수 소리다
툇마루에 앉아 처마 끝에 맺힌
빗방울을
받아먹던 귀는 어디로 갔나
완주 구이(九耳)에서 ‘섭(囁)’ 자가 왔다
귀가 많고 입이 하나니 더 많이 들으라는 뜻이겠지
더 많이 머뭇거리라는 말씀이시겠지
보리수나무가 몸을 흔든다
뽈똥처럼 맺힌 빗방울이
마당으로 내려선 어깨를
제 이파리인 양 친다
멎은 비 온다 없는 귀를 찾아
오고 또 온다


“귀 세개, 입은 하나…많이 듣고 머뭇거리길”

▲ 송은숙 시인
▲ 송은숙 시인

귀(耳)가 세 개 모인 한자를 소곤거릴 섭(囁)이라고 한다. 세 개의 귀를 기울여야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란 뜻일 게다. 여기에 입 구(口)자가 붙으면 머뭇거릴 섭(囁)이 된다. 시인은 이 한자를 귀가 많고 입이 하나니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머뭇거리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머뭇거린다는 건 어찌할까 어찌할까 망설이는 것이다. 머뭇거리며 내리는 비란 멎는가 하면 시나브로 다시 내리고, 언제까지 오나 하늘을 보면 어느새 그쳤다가 다시 추적추적 어깨를 적시는, 그런 비일 것이다. 창에 지문을 찍으며, 보리수나무에 반짝 빛 방울을 뿌리며. 머뭇거린다는 것은 직진이 아니라 감돌고 휘돌아 가는 것, 느리게 움직이며 주변과 눈 맞춤하는 것, 하굣길 웅덩이에서 잘방잘방 장화를 적시며 해찰하는 것. 그런 비를 잠잠히 듣던 귀는 어디로 갔을까. 처마 밑에서 빗방울을 세며 소리까지 세던 귀는 어디로 갔을까. 머뭇거리며 내리는 비는 그런 그윽한 귀를 그리워하며 내리는 비이다.

올겨울과 초봄엔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머뭇거리며 왔다. 민들레와 지칭개와 꽃다지를 어루만지며 왔다. 생강나무와 산벚나무와 모감주나무 뿌리를 적시며 왔다. 보리수 열매 같은 둥근 입으로 소곤거렸다. 봄이야, 어서 일어나.

송은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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