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6]]1부. 붉은 도끼 (6) - 글 : 김태환
상태바
[연재소설/붉은 도끼[6]]1부. 붉은 도끼 (6) - 글 : 김태환
  • 이형중
  • 승인 2024.05.23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 년 전에 뇌출혈로 사지에서 빠져 나온 그는 삶을 성찰하는 깊이가 무척 무겁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뇌출혈이 찾아오던 때의 느낌을 말할 때는 죽음 앞에 맞대면 하고 서 있는 사람 같았다. “누군가 갑자기 도끼로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한 마디는 그가 발표해 왔던 그 어떤 시보다도 내 머릿속을 강타했다. 금융위기로 일 년을 방황하다 출가를 포기하고 문학을 선택한 내 앞에 그의 존재는 사뭇 강렬했다.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구대 암각화에 가게 되었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에 발표한 시집이 반구대 암각화였다. 반구대의 자연환경과 암각화 속의 문양들과도 대화하며 써낸 그의 시는 감미로웠다. 많은 여성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내 사랑은 오늘도 별을 보고 누워 있네. 대곡천이 흐르는 바위절벽 위에서. 내 사랑 물 속에 찰랑이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을 거네 나는 콘크리트 덤불 속에서 대곡천 물소리를 듣네. 눈을 감아도 출렁이는 별빛 오늘 밤도 쉬이 잠들 수 없네.”

그는 암각화 속에 누워 있는 여인의 모습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천 년 전의 여인이라고 했다. 원래는 고래잡이를 나간 선장의 와이프일거라고 추정을 하지만 자신은 그 그림을 보는 순간 갑자기 아주 먼 옛날의 사랑을 알아보았다고 했다. 사랑 사랑 사랑. 그의 시는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을 맺었다.

 

우리는 운동화를 신은 채 가뭄으로 말라버린 대곡천을 건너 암각화 앞으로 갔다. 19명의 학생 중에 유일한 남자였던 나는 그의 조수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시키는 대로 스프레이 물통과 밧줄을 준비해 갔다. 스프레이로 바위벽에 물을 뿌리자 암각화 무늬들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새끼를 데리고 있는 대왕고래의 모습도, 작살에 맞은 고래의 모습도 선명했다. 손바닥을 대고 고래의 모습을 쓰다듬기까지 했다. 뒤이어 호랑이의 모습과 사슴도 나타났다. 모두가 그의 시 속에 등장하는 그림들이었다. 그의 시는 암각화 속에 나타난 모든 그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결정적인 그림은 누워 있는 선장의 아내였다.

“여기 내 사랑이 누워있습니다. 수천 년 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네요. 어때요? 참 어여쁘죠?”

그는 정말로 어여쁜 연인에게 키스를 하듯 바위 면에 입술을 댔다. 나는 옆에 서서 그의 볼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진정한 사랑의 감정이 아닌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퍼포먼스라는 게 느껴졌다.

“선장 와이프가 너무 헤프게 생겼어요.”

어색한 미궁의 분위기 속으로 빠져드는 걸 잡아챈 것은 장 선생이었다. 장 선생은 명문여대 출신으로 수강생 중에 제일 연장자였다. 분위기는 한 순간에 수렁 속에서 쑥 빠져 나왔다. 너도 나도 이구동성으로 떠들었다.

“그러게요. 아무리 그래도 여자인데 다리를 큰 대자로 벌리다니.”

“호호호. 그러게요. 선장 와이프가 아니라 어린 계집아이 같아요.”

스무 명이나 되는 어른들을 감성의 바다로 몰아넣기는 역부족이었다. 낙담한 그의 표정은 고래사냥에 실패하고 빈 손으로 돌아온 선장 같았다. 그는 암각화를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문화적인 활동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나로서는 암각화와의 만남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날은 운동화를 신은 채로 대곡천을 거슬러 올라가 천전리 각석까지 갔다. 물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다보면 깊은 소를 우회해야 하는 구간도 있었다. 내가 먼저 경사진 바위 면을 올라가 나무에 밧줄을 걸고 내려왔다. 한 명씩 밧줄을 잡고 비탈진 바위 면을 지났다.

그날의 암각화 트레킹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K가 천전리 각석 앞에서 문양 하나를 가리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대형 개발로 울산 해양관광 재도약 모색
  • [기자수첩]폭염 속 무너지는 질서…여름철 도시의 민낯
  • 신입공채 돌연 중단…투자 외 지출 줄이고…생산직 권고사직…허리띠 졸라매는 울산 석유화학업계
  • 아마존·SK, 7조규모 AI데이터센터 울산에
  • 울산, 75세이상 버스 무료 교통카드 발급 순항
  • 방어진항 쓰레기로 ‘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