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도 이런 흉측한 물건을 왜 집안에 들여요?”
아내는 정말 무서움을 느끼는지 말을 하면서도 볼살이 가볍게 떨렸다. 아내를 달랠 생각으로 김인후에게 들은 이야기를 대충 추려서 들려주었다. 곁들여서 산 사람이 무섭지 죽은 사람은 무서울 게 없다고 했다. 그래도 아내는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혹시 돌에 안 좋은 기운이 들어있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핏빛처럼 빨간색깔이 께름칙하지 않아요?”
“께름칙하기는, 일본인들은 붉은색이 악귀를 물리친다고 집안에 놓아둔다고 들었소.”
“어쨌든 전 보기 싫어요.”
아내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서재에서 나갔다. 나는 천천히 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첫 장에 적혀 있는 것은 아라비아 숫자로 1에서 10까지 번호를 매겨놓은 문장이었다. 나는 히라가나로 쓰여 있는 첫 문장을 읽어보고 그것이 십계명인 것을 알아보았다. 6번 문장에 빨간색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6. 간음하지 마라-
나는 작가로서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펼쳐 보았다. 간음을 경계하는 것은 기독교 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천수경에 나오는 사음중죄 금일참회라는 대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성의 문제는 인간을 구속하는 족쇄와도 같은 것이다. 십계명을 적어 넣은 맨 끝에 번호도 없는 문장이 한줄 적혀있었다.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마라-
첫 장을 넘겼다. 다음부터는 숫자 따위는 보이지 않고 연속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내가 고향을 찾아 온 것은 얄팍한 향수 때문이 아니다. 부산항을 떠난 지 올해로 꼭 50년 만이다. 내 나이 78세이면 살 만큼 살았다. 무엇보다 홀가분한 것은 에리코에게 할 만큼 했다는 사실이다. 나에게는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 에리코는 작년에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제는 내 곁을 떠난 에리코가 마츠오에게 간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다케시라는 일본식 내 이름은 이제 영원히 사라졌다. 예전이름인 김재성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겠지만 이름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숨만 쉬고 있을 뿐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중간쯤에 잠시 머물러 있을 뿐이다.
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한 가지 깨달음이 있었다. 연이란 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인간의 능력으로는 연의 고리를 모두 헤아릴 수 없다. 마치 수만 가닥의 줄이 뒤엉켜 있는 것과 같아서 그 시작과 끝을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이 생에서 내가 풀어야할 엉겨 붙은 고리는 모두 풀어놓고 가는 게 도리인 것 같다.
50년이면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뀔 시간이다. 그러나 고향산천의 모습은 별로 변한 게 없다. 언양에서 경주로 가는 좁은 길이 고속도로로 바뀌면서 꾸불꾸불하던 옛길이 모두 사라진 것과 한실 마을이 있던 반구골짜기가 사연댐이 생기며 바다가 되어 있는 정도였다. 영축산에서 신불산 간월산을 거쳐 가지산과 백운산에 이르는 능선의 모습은 오십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고 읊은 시조가 있었다. 고향산천은 예와 같은데 사람들은 달라져 있었다. 오십 년이 지난 시점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의 아내였던 김순자도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지 찾을 수 없다. 다행히 큰 집의 조카며느리가 유촌에 살고 있어 만날 수 있었다. 조카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서 홀로 된 조카며느리가 옛집을 지키고 있었다.
조카며느리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김순자는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어디론가 떠나갔다고 했다. 가족들이 모두 어디로 흩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