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12]]2부. 버드나무숲 (5) - 글 : 김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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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붉은 도끼[12]]2부. 버드나무숲 (5) - 글 : 김태환
  • 이형중
  • 승인 2024.05.31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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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굳이 그들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싶지는 않다. 나도 그렇지만 그들도 벌써 나에 대한 기억을 지워 버렸을 것 같다.

나는 마지막 노후를 보내기 위한 약간의 돈을 가지고 왔다. 당분간은 큰 집 조카며느리에게 의지하기로 했다. 자식들은 모두 객지로 떠나보내고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조카며느리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벌써 환갑을 넘긴 나이라 외로움을 타는 것 같았다. 전쟁이 끝나고 지은 집이라고 했는데 두 노인이 살기엔 크고 넉넉했다. 생활비는 매달 섭섭하지 않게 쥐어 주었다.

처음에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예전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며 면서기로 근무했던 면사무소 터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대부분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한국에 오자마자 찾아 낸 곳이 백련정이었다. 학교 다닐 때 소풍을 갔던 곳이기도 하고 에리코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 흐르는 물줄기가 예전과 달라진 곳도 많이 있었는데 정자 만큼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금방이라도 젊은 시절의 에리코가 정자에서 불쑥 튀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은 거의 매일 백련정에 갔다. 유촌 마을에서 백련정까지는 그리 멀지않았다. 아침밥을 챙겨먹고 곧장 택시를 불러 백련정으로 가서 하루 종일 지내다 저녁때가 되어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조카며느리는 이해심이 많았다.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서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나를 위해 과일이며 떡 같은 간식거리를 매일 챙겨 주었다. 비가 오는 날이나 몹시 추운 겨울날이 아니고는 매일 백련정에서 하루를 보냈다. 정자에 붙박이처럼 붙어 지내자 내 모습이 정자에 달린 풍경처럼 보이는가 보았다. 내가 잠시 소피를 보러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면 그 새에 찾아온 손님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오늘은 왜 할아버지가 안계시나 했어요.”

그러면서 사람들은 내가 왜 정자에 붙박이가 되었는지 이유를 묻곤 했다. 나는 젊은 에리코를 추억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늙은이가 시간을 보낼 곳이 마땅찮아서 라고만 대답했다. 사람들은 일본 말투가 배인 내 어눌한 말에도 흥미를 느끼는가 보았다.

한 번은 백련정에 갔는데 삼정 마을을 노인들이 놀러왔다. 그들은 바로 윗동네에 살고 있는 나의 존재를 알아보았다. 이미 나의 존재가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노인 하나가 내일이 자신의 생일잔치인데 참석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끝까지 그 노인의 청을 거절했다. 혹시라도 내 나이또래의 늙은이를 만나 나를 알아보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예전 친구들이 대부분 저세상으로 떠났겠지만 아직 남아있는 친구가 있을 수 있었다.

“자네가 전읍리의 김재성인가? 이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그때 면서기로 다니지 않았었나. 자네가 일본으로 갔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네만 우리는 모두 죽었을 거라고 했네. 어떤 사람은 김일성이가 좋아 북으로 갔다는 사람도 있었고. 그래 어딜 갔다 이제 나타난 것인가?”

분명 이렇게 떠들어 댈게 분명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나는 조카며느리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살아 있는 것이 산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삶과 죽음의 중간지에 잠시 머물러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난 세월의 추억은 모두 에리코와 연관된 것들이었다. 에리코를 처음 만난 것이 두서면사무소에 서기로 다니던 때 였다. 물론 에리코를 우연히 만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에리코의 남편은 언양주재소에 있다가 두서 주재소로 온 일본인 순사 마츠오였다. 면사무소와 주재소는 밀접한 관계에 있어 마츠오를 만나는 일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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