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 등단한 그의 제자들도 모두 모이니 나의 존재감은 더 왜소해 보였다. 아직 등단과정도 거치지 않은 나의 시는 유치한 것으로 치부되곤 했다.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집에 다시 들리게 되었다. 그가 사는 아파트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내 가슴은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K가 시어로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느낌은 이런 것일까 생각했다. 그의 시에서 사랑은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아들을 수 있고 눈을 감고 있어도 다 볼 수 있다고 했다. 천 년이 지나도 사랑은 단번에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미친 듯 흔들리는 가슴이 사랑인 것인가?
그날 나는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말았다. 그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책상 위에 놓여있던 월간문학지를 펼쳐보았다. 겉표지에서 그의 이름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잡지에 실린 그의 시를 보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 그의 시가 실려 있는 페이지를 펼친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제목부터가 내가 지난 가을에 써서 제출한 시였다.
혈관 속을 흐르는 피들이 모조리 거꾸로 흐르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거실 소파에서 세 사람이 마주앉았다.
K와 그의 아내가 같은 소파에 앉고 나는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을 동시에 받아야 했다. 그의 천연덕스런 눈길을 마주보는 순간 온몸이 오글거렸다. 요부의 침실에서 도망치는 순진한 요셉처럼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길 앞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가 탁자 위에 놓인 사과를 먹어보라고 포크를 들어 나에게 내밀었다. 세상에 어떤 조각가가 저토록 아름다운 손 모양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날 있었던 일 중에 그녀의 손 모양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었다. 그때 먹었던 과일이 사과였는지 배였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K의 집을 나오니 어둑한 저녁이었다. 반구대 암각화로 달려갔다. 암각화 앞의 수면이 제법 올라와 있었다. 옷을 입은 채로 물을 건넜다. 물은 허리 높이까지 차올랐다. 바닥에 부드러운 퇴적물이 쌓인 뻘밭이어서 자칫하면 빠져 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무사히 물을 건넜을 때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어둑하게 밀려 온 어둠 탓에 거적을 덮고 큰 대자로 누워 있는 선장 아내의 그림을 찾아낼 수 없었다. 어디쯤이라는 대충의 위치만 짐작할 수 있었다.
벽에 양손을 대고 오랜 시간 생각에 빠졌다. 도대체 아내를 가진 남자가 돌 속에 새겨진 문양 따위를 사랑해서 될 일인가 싶었다. 시라는 것이 아이들 장난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는 죽었다- 내 혼자 단독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K를 만난 적이 없다. 물론 그의 아내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모나리자의 미소를 기억하듯이 그녀의 박꽃처럼 여윈 볼과 대리석 조각 같던 손 모양은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았다.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잊히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가끔씩 나타나 내 꿈을 어지럽혔다.
처음 몇 년은 가끔씩 꿈속에서 K가 나타났다. 그는 언제나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모양으로 나타났다. 그는 언제나 죽어 있었다. 그다음엔 의사가 도끼로 그의 두개골을 열었다. 두개골이 열리고 뇌가 나타나면 의사가 가만히 뭐라고 중얼 거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순두부처럼 몰랑몰랑한 그의 뇌 표면으로 까만 벌레들이 오글거리며 기어 다녔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벌레가 아니라 글자들이었다. 의사가 병을 들어 알콜을 들이 부으면 까만 글자들이 모두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별 것도 아닌 것이 사람을 잡고 있네-
의사가 중얼 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꿈은 즉각 중단되었다. 그런 꿈을 꾸고 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우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