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18]]3부. 하카다 (5) - 글 : 김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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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붉은 도끼[18]]3부. 하카다 (5) - 글 : 김태환
  • 이형중
  • 승인 2024.06.1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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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붉은 돌도끼를 내려놓고 어제 읽다 덮어 든 서류를 펼쳤다. 어제 덮어 놓은 부분을 다시 읽어보고 다음 장을 넘기는데 문맥이 연결되지 않았다.

에리코와 딸 유리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하카다에 있는 에리코의 친정집이었다. 마츠오의 본가는 히로시마의 한가운데 있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에리코가 찾아갈 수 있는 곳은 친정집 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에리코의 친정집이 낯설지 않았다. 에리코의 집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붉은 돌이었다.

배구공만한 크기였는데 빨간 물감을 칠해 놓은 것처럼 진한 붉은 색이었다. 미호천 상류의 백운산 자락에서 캐낸 원석을 가공한 돌이었다. 붉은 돌들이 일본으로 반출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일본의 가정집에서 보게 되니 감회가 남달랐다.

에리코는 오랜만에 친정부모를 만나면서도 즐거운 기분이 아니었다. 조선으로 건너갈 때는 마츠오와 함께 했었다. 그의 부모들은 이미 마츠오의 사망소식을 알고 있었다. 식민지에 가서 남편을 잃고 대신에 어린 딸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라 일본에는 에리코처럼 과부가 된 여인들이 넘쳐났다.

처녀들이 결혼할 상대 남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제국도 미망인이 된 여인들까지 돌볼 여력이 없었다.

에리코의 친정식구들은 나를 눈여겨보았다. 사지에서 딸을 구해 온 은인이기는 한데 어떤 관계인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리코를 일본으로 데려다 준 것으로 나의 소임은 다한 것이었다. 내가 할 일은 다시 해방된 조선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귀국하는 걸 잊어버린 사람마냥 에리코의 집에서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그동안에 에리코는 나와 부딪치는 걸 일부러 피했다. 이제 할 일을 다 했으니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웃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내가 조선 사람인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멀쩡한 젊은 남자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나의 존재는 호기심 덩어리였다. 처음에는 에리코의 남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겨울이 깊어진 어느 날 에리코의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그동안에 내가 한 일이라고는 다다미방에 불을 넣는 정도였다. 에리코의 아버지는 정색을 하고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 동안 에리코에게 이야기는 다 들었네. 내 사위 마츠오와 친한 친구였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두 사람의 우정을 위해 우리 딸을 이곳까지 데리고 와 줘서 진심으로 고맙네. 이제는 자네의 나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나?”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기다리고 있던 넘어야 할 산이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내 결심을 털어놓았다.

“나는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일본남자 마츠오로 살고 싶습니다.”

에리코의 아버지는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에리코에게 청혼을 한 것이었다. 에리코의 아버지는 잘 알겠으니 당사자인 딸에게 물어보고 결정을 내려주겠다고 했다.

다음날 오전 에리코가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자고 했다.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갖는 둘 만의 시간이었다. 공원은 집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는데 일부러 걸어서 갔다. 겨울인데도 바람이 불지 않아 포근했다. 공원에 다다르기 전에 에리코가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절 사랑하셨나요?”

나는 에리코의 첫 질문에 말문이 턱하니 막혀버렸다. 백련정에서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라고 말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대신에 두서없는 말을 빙 둘러댔다.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도 언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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