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제사 이순신의 완벽한 해상장악과 명군의 조선출병으로 도성인 한양이 수복되고 조선의 강토를 휩쓸던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1594년의 가을, 무룡산이 고요함을 깨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은 가을 날씨답지 않게 기온이 뚝 떨어져 한기를 느끼게 한다. 가을비라도 내리려는 듯 아침부터 깜깜해진 하늘은 오시를 지나서도 풀릴 줄을 모른다. 그러나 아직 비는 내리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날씨다.
날씨가 어두운 탓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동해바다가 희미하게 보이는 무룡산 중턱은 평소에도 왕래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주위의 환경 또한 울창한 숲으로 인해서 머리털을 곤두서게 하는 무서움이 느껴지는 곳이다. 삿갓을 깊숙이 눌러쓴 사내가 무슨 일인지 이곳의 오솔길을 빠르게 걷고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나이는 가늠하기 힘들지만 제멋대로 자란 수염은 그가 양반이나 관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할 뿐이다. 군데군데 어지럽게 튀어나온 돌부리나 나무뿌리들이 그의 발걸음을 조금도 늦추지 못하는 것으로 봐서 사내는 꽤나 여러 면에서 단련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사내의 귀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단순히 무리들끼리 연락을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적을 맞아 싸울 때나 먹이사냥을 할 때에 내는 급박한 소리라는 것을 오랜 산중 경험으로 아는 듯 그는 더욱 빠르게 소리의 진원지로 다가갔다.
“우우웅….”
늑대들의 울음소리는 더욱 격렬해졌다. 그때 그의 귀에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여인의 비명이었다. 아홉 마리의 늑대와 두 명의 사람, 한 명은 남자였고 또 한 명은 여인이었다. 사내와 여인은 사내의 키보다 두세 배 정도 높은 커다란 바위를 등지고 서있고, 늑대들은 부채꼴 모양으로 포위한 채 이제 막 공격을 시작했다.
거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여인과는 달리, 사내는 다소 긴장한 모습이지만 아홉 마리의 늑대 앞에서도 전혀 두려움이 없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런 사내에게 있는 것은 무기라 할 수도 없는 적당한 크기의 막대기 하나가 전부였다.
‘3년 가까이 전란이 지속돼서 제대로 먹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조선에 아직도 저렇게 건장한 청년이 있다니!’
삿갓의 사내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막대기를 들고 늑대들과 대적하는 사내는 짐승들의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곁에 있는 여인이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늑대들과의 싸움에서 공격과 방어를 하면서 벙어리인 양 꽉 다문 입술을 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묵묵히 늑대들의 공격에 대해 방어를 하면서 때때로 날카롭게 공격하는 게 전부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동작은 간결하고 전혀 군더더기가 없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