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이 흐를수록 의미가 변하는 것들이 있다. 예전에는 없어도 그만, 있으면 제발 그만이었던 채소를 지금은 저속 노화와 혈당을 위해 1순위로 먹는다. 치과 특유의 시린 냄새와 뼈를 깎는 듯한 요란한 소리에 진료실에서 떨었지만, 이제는 접수처에서 계좌 잔액을 가늠하며 떤다. 터져 나오는 소리에도 칭찬받던 언어가 실수 한 번에 관계의 파열음을 빚는다.
어딘가 쓸쓸해지는 차이의 발원지는 시간이 아닌 책임에 있다. 시간은 절대적이다. 인구를 묶는 지표로서 7080, 2030, 5060으로 뉴스에 자주 등장한다. 어떤 삶을 살든 뭉뚱그려 묶여 나도 모르는 문화, 유행에 이미 속해 있다. 책임은 상대적이다. 60대인 어머니가 ‘젊은 애’라며 챙겨주는 분은 40대이고, 비 맞진 않을까 걱정하는 자녀는 30대이다. 머무른 시간에 책임을 입히는 정도에 따라 역할이 유기적으로 변한다.
“이 대리, 오늘 야근하지?” “과장님, 1인가구라서 제가 못 들어가면 가정이 무너집니다.” 한때 인터넷에서 유명했던 밈처럼 혼영(혼자 영화), 혼코노(혼자 코인노래방), 혼밥이 기본값에 가까워지고 있다. 원가족에서 독립한 순간 이른 나이부터 온전한 가장이 돼야 한다. 얼마 전, 직업과 나이가 다른 열댓 명이 모여 책 ‘단 한 번의 삶’을 읽고 독서 모임을 가졌다. 누군가 책을 인용해 화두를 던졌다. “1등이든 2등이든 살아남는 것이 최선이라는 시대에서 본인만의 살아남기 전략은?”. 돌아오던 대답은 “눈치 없는 척을 한다.” “능력치의 100%를 다 보여주지 않는다.” MZ 세대의 전형적인 대사라서가 아닌 모든 방향이 일 얘기로 모이는 점이 인상 깊었다. 이 시대의 생존은 일과 연결되며, 우리는 유전자 조작 공룡을 숨죽여 피하는 ‘쥬라기 월드’처럼 가만히 있어도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최근에 교육청 지원단으로 활동하며 행사 이면을 볼 기회가 있었다. 부스 뒤에서 볼펜으로 밑줄 쳐 가며 애타게 예약하는 보호자, 작은 돌발 상황에도 뛰어다니며 연락하고 대처하는 직원, 날 선 민원에도 친절을 놓지 않는 운영자, 위급 상황을 위해 끝없이 대기하는 안전 요원 등. 각자 맡은 자리에서 짐을 이고 있었다. 모양은 달라도 저마다의 몫을 짊어지며 평형을 맞췄다. 공동체 정신의 쇠퇴와 잇단 개인주의 선언에도 이렇듯 1인분을 해내는 10명, 100명, 1000명이 자리를 지킨다면 사회의 온전함은 이어질 것이다.
아파트에는 아빠존이 존재한다. 늦은 저녁, 산책로를 걷다 보면 마른 넝쿨이 지붕을 감고 있는 오두막 아래 벤치에 중년 남성이 있다. 이들은 주로 편한 복장으로 앉아서 가만히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항상 혼자다. 그들을 발견하면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가던 발길을 돌리곤 한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하역장이 필요하다. 배정받은 1인분을 다하다 잠시 들를 구석 하나.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면, 공간이든 시간이든 혹은 사람이든 그 구역을 찾아 짐을 풀고 느리게 호흡하자.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배상아 복산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