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서구의 내용을 읽은 그는 채비를 하고 동굴을 나서다가, 아직도 잠들어 있는 국화 누이를 잠시 쳐다보곤 이내 길을 나섰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인데다가 복면을 한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아곡 입구에 수천의 적이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처음으로 긴장했다. 수백 명 정도는 자신 있었지만 수천 명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인시(寅時) 안에 도착해야 그나마 승산이 있다. 아니면 숨어서 적병을 살피며 밤이 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가 조금만 실수를 해도 왜병이 쏜 조총에 자신의 몸이 벌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마에 땀이 나고 등에서는 식은땀조차 흘렀다. 오늘은 적을 척살하는 것은 자제하고 후방을 최대한 교란하는 것으로 작전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천동은 어둠을 뚫고 적의 무리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에게서 끓어오르는 적의를 느끼진 않았지만 그들은 그가 살고 있는 강토를 침범한 자들이고, 그가 마음으로 의지하고 아끼던 사람들을 잡아간 무리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그는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전쟁이라고 해도 살아있는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일이 유쾌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적들의 목을 베면서 느꼈던 더러운 기분도 이제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그의 도착을 확인한 조선의병진영에서 선제공격을 시작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각에 익숙한 지형지물을 이용한 의병들의 공격은 꽤나 효과적이었다. 게다가 천동이 종횡무진 적의 후방을 교란하자 적병들은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한 차례의 교전으로 인한 피해는 양쪽 다 별로 없었다. 의병군으로서는 왜적들의 침입을 막았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적병의 수가 너무 많아서 전면전을 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다. 의병장들과 천동이 모여서 새로운 작전을 협의했다. 다른 의병장들은 천동의 존재를 마뜩찮게 생각했지만, 이눌 장군의 배려로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천동을 제외한 나머지 참석자들은 다 양반 출신으로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같이 모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백정의 자식과 한 자리에 앉아서 작전회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고 모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황희안 장군과 김득복 장군은 천동의 존재에 대해서 침묵하여 묵시적으로 동조하였다. 천동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오로지 이눌 장군뿐이었다. 그동안 전공이 많은 이눌 장군의 설득에 의병장들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자, 본격적으로 회의를 합시다.”
“적들의 수가 우리보다 많기 때문에 밝은 대낮에 직접 부딪혀서 싸우는 백병전은 우리에게 불리합니다. 사상자도 많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니만큼 적들의 동태를 봐가면서 야간에 적군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기습을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계곡의 왼쪽 골짜기에 시목(柴木)을 가져가다 길을 메우고 정병 300명을 차출해 솔밭에 들어가서 소나무를 한 발 길이로 껍질을 벗긴 후에 허수아비처럼 세워놓고 1인당 횃불 2개씩을 지닌 채 그 옆에 엎드려 있게 합시다.”
“그럽시다. 이곳의 지리에 익숙한 의병들을 선발해 매복을 한 후에 야간에 전투를 한다면 우리에게 승산이 있습니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