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인근 계곡에서 칼을 씻었다. 이럴 때는 밤인 게 참 다행이다 싶었다. 칼끝에 선명하게 묻어있는 붉은 피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가슴에서 흘러나왔을 피를 계곡물에 씻자 어둠 속에서도 검은 빛이 났다. 검이 처연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이 보기 싫어서 재빨리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런 후에 왜병의 재갈을 풀어주고 본격적으로 심문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왜병이 천동의 기세에 눌려서 입을 열었다. 포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천동의 귀에 익숙한 조선말이었다.
“살려주세요.”
“조선 사람이었어?”
“네.”
“아무리 주상과 사대부들이 미워도 그것이 동족을 향해서 총칼을 겨누는 이유가 될 수는 없어. 무엇 때문에 왜군에 가담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포로는 모든 걸 순순히 털어놓았다. 그는 양반 댁 종놈이었다. 전란 중에 주인인 생원은 실종되고 혼자된 마님을 모시고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마님이 그를 유혹하였고 젊은 혈기에 동침을 하게 되었는데, 후에 생원의 형제들에게 들통이 나서 광에 갇혀서 죽기 직전에 겨우 탈출을 하였지만 살길이 막막해서 왜군에 가담했다고 했다. 천동은 그의 처신을 이해했다. 지금 자신도 양반 댁 마님과 동굴집에서 같이 살고 있기에 만약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살아남기 힘든 처지였다. 그래서 천동은 포로가 속해있던 서생포 왜성의 왜군에 대한 정보를 세세히 알아낸 후에 한 가지 약조를 받고서 그를 놓아주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같은 조선 사람의 가슴에 총칼을 겨누는 짓은 하지 마시오. 그러겠다고 단단히 약조를 한다면 그대를 방면하리다.”
“내 이후로는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도 절대 조선 사람을 해치는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약조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사내는 허겁지겁 자리를 벗어났다. 천동은 그 사내가 다시는 조선 사람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병 열 명의 목숨을 취한 것보다 기분이 좋았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나는 듯이 나아곡을 떠났다. 그가 무룡산의 동굴집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다음 날 새벽 인시(寅時) 무렵이었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