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간다는 것은 시간을 건넌다는 의미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게 된다. 어제는 이미 멀어져 버린 시간이 되었고, 다가올 내일은 안개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지금이다. 그러나 이 ‘지금’은 너무나 짧게 머무르다 사라진다. 그렇게 우리는 지나가기만 하는 것을 보내며 살아간다. 끊임없이 흐르는 순간순간을 잡을 수 없기에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갔던 누군가의 흔적이 있다. 잠시 후 파도에 쓸려 점점 옅어지고 마침내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지워져 가는 모습이 바로 세월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인연으로 왔다가 인연으로 떠나는 것이다. 자취는 잃어버렸다고 해도, 그가 거닐었던 사실은 여전히 하늘과 바람과 기억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 삶은 수많은 선택으로 이어진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움직이는 팔이나 발 한 걸음조차도, 때로는 인생의 물줄기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주어진 조건을 변하지 않는 운명이라 여기고 변하려고 하지 않는 의식에 자기를 가두기도 한다. 그럴 때는 잠시 멈추어 서야 한다. 그리고는 현재 걷고 있는 이 길이 진정 올바른 길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기대와 두려움으로 만들어낸 길인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나는 단순하게 살기 위해 그리고 삶의 본질을 마주하기 위해 숲으로 갔다”고 했다. 그는 자연과 고요에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주어진 조건이 아닌 자기가 선택한 삶을 강조했다. 우리는 어쩌면 자신의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가느라 자신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운명이란,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이 꿰뚫어 본 진실로부터 시작된다.
프랑스 철학자 시몽 드 보부아르는 “여자가 인간이 되는 것은 태어나서부터가 아니라 선택한 순간 부터이다”고 했다. 이 말은 곧, 존재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의 반복에서 비로소 형성된다는 의미다. 운명 또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고 다듬어지는 과정일 수 있다. 보부아르의 말처럼 선택은 존재를 드러내는 가장 선명한 거울이 된다.
스위스 출신의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운명을 “내면의 무의식이 외부 세계에 던지는 그림자”라 했다. 즉, 운명은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던 바가 삶의 길로 드러나는 과정일 수 있다는 말이다.
운명은 고정된 대본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흰 도화지처럼 펼쳐진 하루 위에, 우리가 어떤 붓으로 어떤 색을 칠해 넣느냐에 따라 완성되는 그림이다. 어떤 날은 물감이 번져 실패처럼 느껴질지라도, 그 위에 덧칠된 온기와 눈물이 결국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그 실패조차도 미래의 아름다움을 위한 한 조각이 된다. 두려워하지 말고, 아직 그려지지 않은 빈 공간을 마주하게 되면 ‘가능성’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도전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라고 여기면 된다.
삶이란 긴 여정이다. 길을 걷다 보면 뜻밖의 갈림길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길은 되돌아올 수도 없다. 선택한 다음에는 새로운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선택이 옳든, 옳지 않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길 위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냈는가 하는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삶을 채우는 퍼즐과 같다. 운명이라는 풍경에서 우리의 모습 하나하나는 작은 한 장면들이 되어 더해지는 과정이다. 그 장면들이 모여 별자리를 이루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신화를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건너는 하루의 시간도, 언젠가 누군가의 기억에서는 별처럼 반짝이는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 우연처럼 시작된 선택이, 한 사람의 생을 이룬다. 삶은 질문이 아니라 대답이다. 시간은 곧 하늘로서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명(命)이라 할 수 있다. 존재는 인간으로서 그 흐름에 반응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직 쓰이지 않은 다음 문장을 준비하고 채우려는 존재이다. 삶이란 한줄기 강물과 같다. 굽이치며 흐르는 물결 위엔 빛과 고요한 상처가 어른댄다. 지나간 시간들이 물비늘로 노을처럼 반짝이다 어둠의 시간으로 잠이 든다. 인생은 시간의 연속에서 희망을 기다리다 시드는 한 송이 꽃일지도 모른다.
김진 김진명리학회 회장
※외부원고는 본보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