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후 곧장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새 왕조의 국호와 왕위에 대한 승인 즉 ‘고명(誥命)’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동아시아 질서는 명의 조공, 책봉 체제 속에 있었다. 황제의 고명으로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고려 유신들을 잠재울 수 있었다. 명은 곧바로 고명을 내리지 않았다. 고려를 정통 국가로 책봉한 상황이라 이성계의 즉위를 왕권의 찬탈로 보았기 때문이다. 급기야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이나 ‘화령’ 둘 중 하나를 간택해 달라고 요청했고, 명 태조는 조선을 국호로 승인했다.
국호 선택까지 명에 맡기고, 거듭 사신을 보내 충성을 다짐한 결과 2년 후에야 책봉을 받아냈다. 조선은 개국부터 힘의 질서가 통용되는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을 절감했다. 그럼에도 성리학의 이념에 지나치게 경도돼 산업을 통한 국부 축척은 도외시한 채 사농공상의 질서를 고집했다. 여기에다 끊임없는 당파적 정쟁으로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고 주변 강대국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현재의 최강국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취임하자마자 교역국에 대해 고율의 관세율과 협상 기한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각국은 앞다퉈 트럼프와 관세율 협상을 벌였다. 엄연히 세계무역기구(WTO)의 규범이 존재하고, 한·미 FTA 조약이 파기된 적이 없는데 누구 하나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일방적으로 통보한 높은 관세율을 기준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각도에 따라 줄여나가는 방식이라 협상이라기보다 고명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일본 총리 이시바는 트럼프에게 금색 사무라이 핼멧을 선물하고, 우리 장관들은 트럼프가 골프를 즐기는 스코틀랜드까지 쫓아가서 알현을 청했다. 여전히 힘이 지배하는 현대판 고명을 그대로 보여주는 웃픈 장면이다.
고대 그리스의 강국 아테네의 사절단이 중립국 멜로스가 아테네 동맹의 합류를 거부하자 ‘우리는 그대의 관계를 정의나 공정함이 아닌 힘과 이익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자는 감내할 수밖에 없다.’라고 한 겁박은 여전히 유효하다.(투키디데스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사’) 아테네의 제안을 거부한 멜로스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지금도 강대국의 힘에 의한 질서가 여타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현실에는 큰 변화가 없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달 31일 관세율 15%, 투자금 3500억달러에 가스 구매 비용 1000억달러 정도에서 합의를 했다고 한다. 아직 구두 합의 단계라 모호한 부분이 있지만, 앞으로 양국의 대통령이 만나 세부사항을 문서화할 것으로 보인다. 한 고비를 넘겼다는 언론의 논평이 주를 이루는데 고비는 지금부터가 아닐까 싶다.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노련한 협상가인 트럼프가 어떤 변덕을 부릴지, 방위비는 얼마나 요구할는지, 농수산물 개방은 완결된 것인지, 북한의 핵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자세를 보일지 등 아직 산 넘어 산이다. 당장 증시가 폭락하고 원화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 관세 고명의 후폭풍이 어디로 뻗어갈지 국민은 불안하다.
트럼프의 등장으로 인한 보호무역주의 강화, AI 로봇의 상용화로 인한 산업구조의 변화, 중국의 굴기, 북한의 핵무장 등 우리를 둘러싼 먹거리와 안보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게다가 기업환경의 악화로 인한 코리아 오프쇼어링이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노란봉투법을 둘러싼 여·야의 대치는 국민을 더욱 뒤숭숭하게 하고 있다. 노란봉투법의 핵심은 직접 사용자뿐만 아니라 원청에 대해서도 근로조건 자체를 교섭대상으로 삼을 수 있고, 불법 파업에 대한 면책권의 광범위한 보장에 있다. 노조의 경영개입과 산업생태계 붕괴를 우려하는 기업들의 반발이 클 수밖에 없다.
이례적으로 주한 유럽상공회의소에서 한국 시장 철수 가능성을 거론했다는 일부 보도는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준다. 집권하자마자 세찬 변화의 폭풍우를 마주한 거대 여당은 지지층만을 위한 포플리즘 정책, 감성적인 대북정책, 언론과 사법 장악, 정치 보복 등의 낡은 레퍼토리로 힘을 뺄 때가 아닌 것 같다. 철 지난 이념의 안경을 벗고 공화(共和)의 큰 걸음을 걸어, 운명을 스스로 결정 할 수 있는 국가로 도약하는 실력을 보여줄 것을 모두가 기대하고 있다.
신면주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