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숙의 문화모퉁이(24)]20세에 태어나 50세에 죽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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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숙의 문화모퉁이(24)]20세에 태어나 50세에 죽는다면
  • 경상일보
  • 승인 2025.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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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숙 UNIST 교수·언어인류학

만약 인간이 20세에 태어나 50세에 죽는다면?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유아, 아동, 청소년도 없고, 노인도 없는 사회. 이 상상은 어쩌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은밀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초등학교 운동회 소음에 대한 민원도 없고, 부모와 소통이 잘 안되는 중2병 자녀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고, 카페 키오스크 앞에서 오랜 시간 동안 주문하는 노인들 뒤에서 불안하게 기다릴 필요도 없다.

생각해 보면 이 상상은 결코 낯설지 않다. 아동과 노인에게만 국한하자면, 이미 많은 이들이 그들을 사회의 ‘비효율성’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은가? 노인과 아이는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에게 불편을 준다고 보는 시선이 사회 곳곳에서 목격된다. 버스에 천천히 올라타는 노인은 느리다고,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은 시끄럽다고 모두가 눈치를 준다. 어린이집이나 키즈카페 같이 인위적으로 잘 꾸며놓은 시설이 아니라면 아이들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적으로 본다. 가령, 유아동반칸임에도 불구하고 기차에서 아이들이 조금만 조잘거리거나 칭얼대면 조용히 하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다. 아이가 소리를 내는 것을 아예 봉쇄하지 않으면 아이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서 공공시설에 데리고 나온다며 엄마들을 비난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런데 과연 20세나 30세 성인은 타인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마냥 행복하기만 한 사회일까? 흔히 청소년이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완벽한 성인이 되길 바라는데, 실은 대학교에서도 계속 실수하고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사회 생활을 시작한 청년들은 여전히 도전적인 일에 대처하는 실력이 미흡하고 어수룩하다.

성인이 돼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 넷플릭스 드라마 ‘미지의 서울’은 청년이 겪는 자기혐오, 타인의 시선, 자신감 상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모두가 성공한 듯 보이는 서울에서 주인공은 점점 자신을 믿지 못하고, 끝내 자신을 혐오한다. 조직 내 타인의 시선은 날카롭고, 자신은 점점 작아진다. 이 드라마는 혐오가 타인에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향하게 된다는 진실을 조용히 폭로한다. 1970년대에 영화화된 소설 <로건스 런>(1967)에서는 모든 의식주가 충족되지만 그 대가로 수명이 고작 21세로 정해진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그 사회에서는 젊은 인구 덕택에 겉보기에 활기차고 세련됐을 뿐, 내면에는 차별과 억압이 가득하다. 한국 사회에 국한해 상상을 이어가자면, 20대와 30대로만 구성된 사회에서 결국 25세는 20세를 ‘애송이’라 부르고, 32세는 38세를 ‘꼰대’라 부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를 찾아내고, 그들을 배제한다. 타인은 항상 ‘너무 느리거나’ ‘너무 시끄럽거나’ ‘너무 눈치 없어서’ 불편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그야말로 K-팝, K-드라마, K-민주주의로 이름을 떨치는 ‘다이내믹’한 한국에 주목하게 됐다. 그러나 정작 그 안의 우리는 서로의 다름조차 견디지 못한다.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노인의 느림도 감내하지 못하는 사회가 과연 ‘다이내믹’할까? 아이를 혐오하고, 노인을 혐오하는 사회는 결국 과거의 나를, 미래의 나를 혐오하는 사회이며 그러한 사회는 지속되기 어렵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혁신’적 기술이나 ‘다이내믹’한 문화 창출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 때문에 결과하는 불편함을 감내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공존이 필요한 때이다. 공존은 참을성이고, 기다림이며, 때로는 물러섬이다. 느린 노인도, 시끄러운 아이도, 불안한 청년도, 그 모두가 사회를 구성하는 ‘속도의 다양성’이다. 어떤 열차는 급행이고, 어떤 열차는 완행이다. 진정한 공존은 불편함이 없는 사회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불편함을 감당할 수 있는 관계에서 시작된다. 아이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 노인의 반복된 이야기, 청년의 우울한 속삭임과 같은 다채로운 음색을 섞어 듣는 것이야말로 진짜 행복한 사회이다.

최진숙 UNIST 교수·언어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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